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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2

202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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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기획
미투 그 이후…
안전하고 성평등한 예술환경을 위한 제언

미투운동이 시작된 지 4년.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고발과 이들과 지지하고 연대하는 조력자들의 노력으로 문화예술계의 잘못된 관행들을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예술계에 남고 피해자만 고통 받는 현실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계가 더 안전하고 성평등한 곳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4인(브장 웹툰작가, 서혜진 변호사, 송원 연극인·성폭력 성희롱 전문예방강사 그리고 권이은정 무용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한다.

브장 작가

“나,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 여기 있어요》는 2013년 웹툰계 성폭력을 고발한 만화이자 나의 경험을 담은 이야기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계기가 있었다. 한겨울, 나에게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던 작가에게 고소를 제안하자 그가 ‘000 사건 피해자는 승소했어도 업계를 떠났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면 어떡해요’라고 말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내가 그 사건 당사자인 줄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그 일화를 통해 알게 됐다. ‘난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2017년 10월, 미투운동이 시작된 후 4년 가까이 지났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 피해자는 여전히 당시에 머물러 있다. 2021년의 피해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많은 피해자가 가해자와 그의 주변인들에게 보복성 고소를 당하고 있으며,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들이기에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복귀했다. 심지어 공공기관까지 ‘형사처분’ 전과가 없다며 복귀를 돕는 실정이다. 그럼 형사처분을 받은 사례는 좀 나을까? 고소부터 대법원판결까지 최소 1년 반~3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닌’ 상태로 존재한다. ‘혹시 가해자가 누명을 썼다면?’이라는 가정 하나로 말이다. 힘겹게 싸워 유죄판결을 받아도 ‘요즘 법이 피해자들에게 유리해’, ‘실수 한 번으로 생업을 끊기엔 가해자가 불쌍해’, ‘그래도 가해자가 실력은 좋았어’라는 말이 들려온다.


결국 누가 피해자를 내쫓고 있는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피해자를 불편하게 바라보았을, 피해자를 의심했을, 가해자를 불쌍해했을 ‘우리’이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냈던 피해자는 매순간이 소모의 연속이다. 모두의 과제를 왜 한 사람에게만 짊어지라 하는가? 모두 한목소리로 피해자를 지지하고, 가해자의 잘못임을 말한다면 ‘당연한 듯’ 업계를 떠나는 사람은 가해자가 될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말해주길 당부한다. 당신을 지지하는 우리가 ‘여기 있다’라고.



서혜진 변호사

예술의 창작환경에 대해서 더 예민해져야

성희롱·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말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과정에 “예술”이 개입되면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 상대가 피해자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명 예술가라면 더 어려워진다. 성폭력 피해라는 본질은 어느새 사라지고 상대방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불순한 동기를 가진 ‘피해자’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희롱·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 기반한 일상의 문제이고, 그 안에 어떠한 이념도, 예술행위도 개입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성폭력은 국가의 형벌권이 발동되는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창작과 예술의 현장에서 폭력과 성폭력, 위력을 사용한 모든 종류의 괴롭힘은 놀라울 정도로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다.

201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미투운동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평등하고 안전하지 못한 제작 환경, 권력의 비대칭성에서 오는 약자에 대한 폭력과 성적 괴롭힘의 문제, 피해자의 권리보호 제도의 현실적 부재를 지적하며 더 나은 창작환경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가 이들과 연대하며 문화예술계 내의 잘못된 관행과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내게 있어 문화예술계에서 발생한 수많은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을 변론하는 과정은 우리 머릿속에 은연중 들어 있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때를 하나둘씩 벗기는 작업이기도 했다. 관객들이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낼 때 ‘저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도 박수 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던 어느 피해자의 덤덤한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법정에서, 그리고 법정 밖에서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술의 가치를 창작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무척 예민하다. 하지만 연극, 영화, 음악, 미술··· 현대사회의 복잡다양한 창작의 산물이 어떤 환경을 거쳐 탄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크게 예민하지 않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예술작품의 탄생과 창작환경에 대해서도 이제는, 아니 한 번쯤은 예민해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문화예술계에서 왜 하필 성평등을 주장하느냐 묻는 동료들에게”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강사 활동을 예술작업과 병행하는 나에게 예술인 동료는 이렇게 물었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문화예술계에서 왜 하필 성평등이야?” 2년간의 강의경험을 통해 현장에서는 여전히 성평등이라는 키워드를 어렵고 불편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질문의 요지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늦지 않았길 바라며 예술인 지면을 통해 답하고자 한다. 

예술인은 여타의 노동과 다르게 종사자의 생계를 위한 행위와 구별되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예술인의 창작물은 관객, 독자, 리스너를 만나고 이 과정을 통해 대중과 예술인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관계임을 자각하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다. 최근 문화예술을 좀 더 가깝게 느끼는 대중이 늘어나면서 예술가와 대중의 관계성을 재정립하는 문화가 정착되었고 창작물을 창작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인식, 성평등한 창작물과 창작자의 안전함을 담보한 창작환경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커졌다.

그러나 ‘먹고살기니즘’의 시급성을 주장하며 성평등을 번거로운 과제로 치부하는 현장의 분위기는 무엇 때문일까? 과정은 생략된 채 여전히 ‘잘 만들어진 결과물’만을 요구하는 지원사업의 형태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성차별과 성폭력, 노동착취, 위계폭력을 묵인하며 예술의 미덕인 양 ‘썰’로 포장되어 버리는 문화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문화예술계가 다시 쓰이길 원한다. 작품을 수치화하는 방식의 선정 과정을 뒤집고 예술가를 양적 척도로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길 원한다. 예술인은 창작물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며 세상을 바꿔가는 변화의 주체임을 인식하길 원한다. 예술인의 노동력은 가치 있으며, 이것을 외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동료임을 발견하길 바란다. 왜 성평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성평등을 외칠 뿐이다. 성평등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등한시했던 예술인 복지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권이은정 아프리카댄스컴퍼니 따그 대표·오롯위드유 활동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예술이다”

그이는 기품부터 당당했다. 뮤지컬 배우를 연상시키는 발성과 태도로 증인대에 서서 이름을 밝힐 때부터 ‘작정하고 나왔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생면부지였던 그 사람을 법정에서 마주친 게 작년 4월이었으니 1년 반 가까이 된 일인데도 이름을 잊지 못한다. 가해자와 동향 출신이라던 이 무용수가 번듯한 차림새로 위증을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추했기 때문이다.

2019년, 유명 현대무용가가 저지른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방청연대에 참여하면서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의 반성폭력 분과인 ‘오롯 위드유’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2020년 6월,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법원이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계속 법원에 드나들며 일견 평범해 보이는 예술인들이 어떻게 진실을 배반하는지 의도치 않게 지켜보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사람을 흉보는 것은 쉽다.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매일 만나는 동료가, 명망 높은 우리 교수님이, 평소 존경하던 안무가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나서서 욕먹지 않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침묵을 선택한다. 심지어 법정에서 마주친 이들처럼 없는 말도 지어내며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우리는 가르쳐야 한다, 예술은 만능 치트키가 아니라고. 예술가는 뭐든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술과 사람은 분리될 수 없다. 발걸음 하나에도, 손동작 하나에도 창작자의 가치관이 실린다. ‘실력이 좋으니까, 작품을 잘 만드니까’라는 핑계로 가해자를 계속 무대로 불러들인 역사를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1999년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은 모 안무가는 이제 존경받는 원로로 여전히 큰 무대에 버젓이 등장한다. 그때 무용계에서 자정 능력을 보여줬더라면, 가해자는 설 곳이 없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더라면, 이토록 많은 이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무용을 포기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는 수치스럽지 않다. 피해자는 억울하고 분노한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수치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속한 커뮤니티의 개개인의 노력이 법원의 판결보다 중요하다. 법정 뒤에 숨지 말고 지금 당장 입장을 고민해보자. 그게 예술가인 나를 지키고, 내가 몸담은 예술을 지키는 일이다. 성숙한 예술가는 부끄러움을 알고 실수하면 성찰한다. 추한 것을 감추는 게 아니라 고발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