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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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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기획
나는 청년예술인입니다

이 땅에서 청년예술인으로 산다는 것

최서윤 작가·단편영화 감독

일단 덥석 받아들였다. 걱정은 그다음이었다. 이 원고에 대한 얘기다. 글자 한 점 없이 깨끗한 ‘새 문서’를 노려보며 적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니, 옅은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의뢰받은 글의 주제가 퍽 어려웠던 탓이다. 편집실에서는 “이 땅에서 청년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글을 원했다. 청년예술인 중 하나로서 내 경험과 생각을 쓸 수야 있겠지만, 그것을 다른 예술인들이 공감해줄지가 걱정이었다. 예술가들 각자의 경제적 배경이나 상황, 창작의 동기와 작업 방식이 모두 다를 텐데, 개인적인 견해를 펼쳤다가 괜히 욕이나 들어먹으면 어쩌지?

돌이켜 보자. 도대체 나는 왜 이 글을 쓴다고 했을까? 제시된 원고료가 거절하기 아쉬운 액수였다. 이것에 대해 툭 까놓고 말하며 글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것만은 분명 대부분의 예술가가 공감할 것이다.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에서 용역 의뢰는 (터무니없는 조건이 아닌 이상) 매번 소중하다는 사실 말이다.

프리랜서 예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

2018년 예술인 실태조사에서 프리랜서 비율은 전업 예술인 76%, 겸업 예술인 68%로 드러났다. 예술인 대다수가 프리랜서인 셈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의 5일, 9 to 6 출근하는 직장에 속해있지 않다.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삶의 구조다. 물론 대개 한국인의 삶은 다 불안정하지만, 프리랜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젠가 게임을 해봤다면, 한 조각만 꺼냈을 뿐인데 탑이 와르르 무너진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 전에 이미 아슬아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삶이 딱 그렇다. 파편적인 일의 의뢰가 지속해서 받쳐줘야 지탱되는 구조다.

그런데도 이런 삶의 구조를 이어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창작 활동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크다. 직장에 속한 노동자가 되면 장기적인 삶의 계획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직장 다니면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예술인도 드물지만 있겠지. 문제는 내가 여유 시간이 넉넉하게 확보돼야만 하는 예술인이라는 거다. 멈춰 생각할 수 있는, 일상의 루틴에 잠식되지 않는 시간의 확보가 내겐 중요하다. 그러니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시간을 확보할 수밖에.

역지사지에서 출발하는 창작의 영역

불안정성을 끌어안더라도 예술인의 삶을 이어가고 싶은 이유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기성용 선수를 좋아한다. 아주 오래전 그가 한 말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나는 종종 답답했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사람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할까? 누가 자기한테 저러면 자기도 기분 더러울 거 아냐? 역지사지의 미덕을 좀 발휘할 수 없어?

사실 알고 있다. 역지사지를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 각자 경험에 따라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고, 이입의 강도 역시 사안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기성용에게 감정 이입했지만, 누군가는 ‘니들’에 이입할 것임을 안다. 자신의 경험 밖에 있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입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인식은 창작 활동으로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답답하니까 뭐라도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이 예술적 충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대해, 그 정서적 맥락과 주장에 대해 공감을 얻는 작업, 그로써 사회가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는데 기여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

예를 들어 내가 기획하고 제작한 보드게임 〈수저게임〉은 ‘흙수저’의 입장에서 만든 것이다. 2015년, 한국 사회에 수저계급론이 대두됐다. 자신의 수저를 말하며 한탄하는 이들은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고 계급적 격차가 커지는 현실을 자조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해 자조하는 무력한 개인들만으로는 시스템을 개선할 수 없다. 나는 흙수저들이 더 나은 시스템을 위해 토론하고, 더 나아가 정치력을 갖추고 집단적 협상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이는 일종의 학습교구로써 〈수저게임〉을 만들고 여러 차례 워크숍을 진행하는 일로 이어졌다.

작년에 연출한 다큐멘터리 〈망치〉 역시 같은 결로 볼 수 있겠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관련 사회적 비극이 왜 이리도 자주 빚어지는지, 관련 사건을 접할 때마다 답답했다. 토지 및 건물 소유의 권리가 그곳에서 실제 활동하는 사람의 권리보다 앞서는 게 정말로 당연한 일인가? 한국 사회가 재산권을 지나치게 떠받드는 것은 아닌가? 〈망치〉를 보고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랐다. 순진할지 모르지만,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의 응집된 힘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더 나은 체계와 문화로 나아가게 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일과 예술, 아슬아슬한 균형 사이의 청년예술인

‘답답함’과 같은 정서적 자극은 창작을 추동한다. 그리고 한국은 뜨거운 감정의 도가니와도 같다. 치열한 경쟁, 서열 나누기, 약자에 대한 착취 등이 일으키는 열패감, 모멸감, 분노 등으로 연일 뜨겁고 시끄럽다. 그만큼 창작의 소재가 널려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와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만 하다면, 어쩌면 한국은 예술하기 좋은 나라일지도. 그게 어려운 곳이라 온갖 부정적인 자극과 감정으로 들끓는 도가니가 되었겠지만.

금수저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청년예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균형의 수호자’가 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수익을 위한 일과 창작 활동의 균형을 이루며 무너지지 않도록 조각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아슬아슬 휘청일지라도. 나는 언제까지 이 탑을 지켜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