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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돈 때문에 연극을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술작업을 업으로 택한 후 활동하면서 들었던 말이면서 ‘숫자’와 관련된 것 중 가장 강렬한 문장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조금은 억울한 듯, 조금은 화를 내듯 말했기 때문일까. 혹은 그런 말이 나올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때 듣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신파적인, 신파적일 만큼 ‘당연한’ 이야기가 내 뇌리엔 오래도록 남아 있다. 2018년의 어느 날이었다.
바로 그날, 2030 연출가 8명이 〈10분 희곡 낭독 페스티벌〉의 연출을 제안받고 모였다. 해당 작업은 내가 훗날 “8명 정도의 청년 연출가를 섭외해 연출가 개인에게 많지 않은 금액을 주고 알아서 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작업이었다. 나의 손에 4편의 10분 내외 희곡과 300여 만 원 정도가 주어질 거라는 사전 안내를 들었을 때 사실, 처음엔 하고 싶지 않았다. 2년째 서울청년예술단으로 선정되어 지원금을 수령하면서 소위 ‘눈이 높아져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하느니 그 시간에 다른 작업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금액이 아니라 기회로 봐야 한다”는 동료의 조언에 따라 하겠다고 답변을 보낸 후에도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희곡을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등장인물 수나 사운드 등 때문에 협력 아티스트가 꽤 필요한 분량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었다. 과연 나는 이 금액을 적정하게 협력 아티스트들과 ‘나눌’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인건비와 제작비의 분량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내가 그것을 알고 있던가? 나는 스스로와 동료들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이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그건 공연예술계 미투운동을 하면서 나를 감쌌던 어떤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연극계에서 ‘괴물’만 몰아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권력과 기회를 독점하고 부당하게 착취를 일삼아온 그 괴물 몇몇만 사라지면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다 같이 행복하게 연극을 할 수 있는 걸까? 그 불공정이 그토록 오랫동안 관행이라 불리며 연극계에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면, 나라고 그 괴물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걸까? 아니, 내가 괴물과 정말로 ‘다른’ 존재이긴 한 걸까? ‘기회’라는 말에 걸려 작업에 참여하게 된 나는, 여기서 “같은 값으로 다른 또래 연출에 비해 최대치의 가성비를 뽑아내는, 정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전혀 하지 않은 걸까?
예술인이라면 언제나 최고의 작업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어쩌면 그 순수한 열정은 쉽게 변질되거나 쉽게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콜렉티브 팀의 기획, 연출 그리고 텍스트를 모두 담당하는 사람이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기를 꺼리지 않는 성격 탓에 팀을 대표하는 자리까지 겸하고 있는 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괴물’이 되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걱정 탓에 나와 동료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이어가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돈’ 문제가 명확히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그 작업을 제안받은 이유 자체도 어쩌면 일종의 착취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우리 팀은 몇 년 동안 함께 공연을 만들어왔는데 왜 연극센터에서는 내 개인의 손에 이 무거운 결정권을 준 것일까. 우리가 아무리 공동창작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고안하고 실험하더라도 결국 ‘작품’은 연출가의 것이 되어버리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떠넘겨진’ 걸까. 고민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러던 차에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여러 명의 연출가가 같은 금액으로서 같은 수의 작품을 꾸리게 되었다면, 정말 우리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여 얼마를 벌게 되었는지 한 번 재어보면 되잖아! 개인적 욕망의 문제나 연극계의 구조적 관행 같은 것은 지금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없겠지만 숫자로 딱 떨어지는 돈과 시간을 측정한다면, 그리고 이를 최저임금과 비교하는 작업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같이 작업을 하기로 했던 또래 연출가들에게 ‘예술노동 적정임금 찾기’라는 다소 거창한 실험을 제안했다.
그러고 나서 듣게 된 말이, 이 글을 시작하며 처음 쓴 저 말이었다. 돈 때문에 연극하는 게 아니라는 말. 사실 그렇게 대단한 제안도 아니었다. 함께 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작업 참여자 전원이 1) 각자의 작업 할애 시간을 측정하고, 2) 아티스트 피로 받은 금액과의 계산을 통해, 3) 당시의 최저임금과 비교를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걸 함께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후에 각 팀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함께 글 같은 것도 써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제안의 어느 부분이 그 연출가를 울컥하게 만들었는지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바닥’인지 우리 눈으로 굳이 확인해야 하는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 불 보듯 빤한 결과를 굳이 ‘이 좋은 기회에’ 하고자 함은 무엇인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실험이 우리의 예술에 대한 열정 전체를 시험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쯤 이런 형태의 예술적 연구가 한국 예술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인지 당사자들이 정확히 알아야 처우 개선을 요구하든, 구조적 변화를 요청하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 이야기는 이러하다. 8명 중 함께 해보자고 한 연출가 수는 많지 않았고, 실제로 작업을 수행한 수는 더 적었으며, 추후에 결과를 동료들과 공유하고자 한 수는 더 적어졌다. 나는 최소한의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면 우리의 최저임금은 얼마나 높아질까 궁금해서 이 실험에 동참할 네 명의 협력 아티스트(고영훈, 김정은, 부진서, 최희범)와 해당 작업을 함께 했다. 모여서 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각자의 연습 및 제작, 구매의 시간을 모두 체크하되 최대한 ‘덜 하려고’ 노력해보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보자는, 소위 “예술인 태업”을 진행했다. 개인적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팀 모두의 시간당 임금은 5,000원을 넘지 못했다.
흥미로운 질문들도 남겼다. 문득 수다를 떨다가 떠오른 ‘영감’의 시간도 나의 예술노동의 시간일까? 모두의 경력이나 실력이 동일하지 않은데, 만일 이것을 ‘시간이 쌓인 양’이라 본다면 금액은 얼마나 더 높게 책정하는 게 좋을까? 이 실험을 위해 추가로 들인 시간도 예술노동 시간일까? 노동이 맞긴 한 걸까? 적정한 예술인 표준사례비는 얼마나 되어야 할까?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예술인들을 위한 적정한 사례비 기준을 찾아나가는 것 혹은 만들어가는 것은 개별 예술가에게 떠넘겨져 부담이 되어버린 문제를 짚어내는 한편, 이미 우리 연극계가 그러면 실패할 수 있다고 경고한 지점들을 진단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과 너무 멀지도 않아야 할 것인데, 그 현실이 예술계 현장과 대한민국 전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이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가능하게 초심을 잃지 않으며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정말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