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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생계를 다투는 코로나의 세계적 유행 속 예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일상과 균형을 맞춰온 예술이 코로나 일상으로 경광등을 번쩍이며 달려야 하는 위급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예술 행정 현장에 있는 경기문화재단 강헌 대표의 글을 통해 코로나로 위기에 봉착한 예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재고하고 숙고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8월 14일부터 이틀간 열린 새말모임에서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 시대’의 대체어로 ‘코로나 일상’을 제안하였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선정하였습니다. 하여 필자의 원제였던 〈‘위드 코로나’시대 예술의 운명’〉도 이에 준해 수정하였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제로 콘택트 시대, 예술은 정처를 잃었고 예술가는 절망의 문턱에 서 있다. 프리랜서인 내 제자, 공연 조명감독은 지난해 11월 이후로 단 한 건의 일감이 없었고, 스물세 번째 개인전을 연 후배 중견 전업 화가는 난생 처음으로 단 한 점도 팔지 못해 생계의 위기에 몰렸다. 얼핏 보아 미술은 코로나 국면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위축된 투자 심리가 지갑을 닫은 탓이다. 온라인이나 모바일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나 웹툰 같은 일부 분야와 넷플릭스 같은 거대 콘텐츠 미디어는 호황의 조짐에 표정 관리 중이라지만 전통적인 예술 장르의 경우, 경중의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일거에 존립 자체를 근심해야 하는 위기에 몰린 것이다.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문화센터 등 오프라인에 기반한 예술 인프라들은 문을 닫거나 개점 휴업이나 다름없는 행정 지시를 받았고, 긴급 지원 형태로 진행된 예술 뉴딜 정책은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의 현실적인 효과를 창출하지 못했다. 워낙 예산 규모가 작은 탓도 있지만(상반기 서울 및 경기문화재단이 긴급 투입한 예술 뉴딜의 재원이라고 해봐야 각각 50억 수준이다.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이면 누구나 지급한 재난기본소득과는 달리 어느 누가 예술가인지, 어디까지를 예술가로 인정할 것인지, 그것도 전업예술가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과 데이터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탓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급작스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기에 혼란은 필연적이다. 가장 손쉽게 도출된 솔루션은 온택트(Ontact) 콘텐츠로의 전환과 그것들을 조직하는 플랫폼의 급조이다. 특히 공공의 영역에서 (어차피 써야 할 지원 예산이므로) 무관중 퍼포먼스로 영상물을 제작하여 예술가와 예술단체에게 제작비를 지원한 방식이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신속하게 파급되었다.
이것은 예술 생산자들에 대한 지원의 측면에 한정해 볼 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성이 중요한 무대 공연예술을 온라인 영상 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타당한 의미가 있을까? 록밴드의 공연은 그렇다치더라도 연극을 평면적인 화면으로 본다는 것을 과연 연극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박물관 혹은 미술관의 작품을 영상으로 관람하는 것을 예술적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온택트 솔루션이 치명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예술 수용자들의 향유 감수성이다. 그것은 대량 생산과 대량 복제를 전제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업적 영역의 일부 대중예술에 한정되는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지난 6월에 있었던 세계적 규모의 팬덤을 지닌 방탄소년단의 온라인 콘서트 정도가 대안적 솔루션으로서의 의미를 과시한 유일한 사례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땅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방탄소년단이 아니다. 장르의 미학적 특수성을 고민할 틈도 없이 급조된 영상 콘텐츠들은 ‘지원에 대한 사업적 증빙’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예술은 이대로 소멸할 것인가? 디지털TV와 PC모니터, 그리고 모바일의 작은 화면이 간신히 승인하는 극히 일부의 장르만이 간택되는 묵시록적인 미래 사회로의 급속한 이행만이 허락될 것인가? 시장의 논리가 전통적인 예술을 소멸시킬 것이라는 위기의 경고등은 지난 세기 중반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 (예술)시장마저 소멸의 운명에 봉착했다. 이것이 코로나19 시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포고령이다.
우리가 예술의 존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제일 먼저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인류 사회에서 예술이 선택재로 합의된다면(가령, “예술? 그건 너희들이 좋아서 하는 거잖아? 예술이 밥 먹여줘”하는 시각이 득세한다면) 방탄소년단처럼 자체 생존 능력을 지니지 못한 예술 혹은 예술가들은 이제 단숨에 무장해제 당할 것이고, 예술은 여가 선용의 취미성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이 첫 번째 전선의 합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술이 아무리 지극히 개인적인 자발성의 결과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류 문명의 중요한 기반이며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회적 요소라는 인식에 도달할 때 그 공공성은 가치 있게 수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전선의 지평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 예술의 공공적 가치를 예술과 예술가들 또한 전력을 다해 소명하여야 한다. 나는 예술가니까 지원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세상에 없다. 자신의 예술 행위가 왜, 어떻게 공공성을 지니는지를 현실적으로 증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아젠다가 아니다. 하나의 예술이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수용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어떤 변화를 생성시키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확장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산업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예술의 수용자들은 익명화된 소비자로 전락해왔다. 성공한 예술(가)은 시장의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의 룰은 바뀔 것이다. 예술 생산자와 예술 수용자가 상호주체성을 지닌 동등한 존재로서의 세계로 우리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할 때 예술은 인류 모두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투어야 할 세 번째 전선은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새로운 예술 정책의 출현을 두고 벌이는 논쟁 혹은 경쟁에서 형성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고든다면, 공모지원 사업에 기반을 둔 기존의 반복적인 예술 창작 지원 정책을 뛰어넘는, 가장 공격적인 복지로서의 획기적인 예술(가) 인프라 조성 정책이 필요하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예술국가, 예술도시 정책이 필요하다.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성숙한 예술 시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개발도상국 시절일 때 모든 시민은 산업의 역군이었다. 그리고 선진국의 문턱에 발돋움할 때 한국은 민주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했다.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국가의 일원으로 성장한 지금 예술시민이라는 보다 더 진화한 시민 모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모두가 비대면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언제 대면해 본 적이 있던가? 진심으로 대면해 본 시대가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예술은 오직 자신의 우월성을 발휘하고자 했던 욕망의 도구는 아니었던가?
수만 명이 운집한 대규모 콘서트의 꿈은 이제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천만 관객의 신화적인 승리 또한 한여름 밤의 꿈의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제 예술은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와 진심으로 대면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 단위는 어쩌면 가족이 될 것이다. 1인 가족에서 대가족에 이르는, 바로 그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가족.
우리는 다시 알타미라의 동굴로 돌아간다. 우리는 공포와 희망이 가로지르던 그 원점의 공간에서 다시 예술의 본질을 체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절멸하지 않고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의 하나가 예술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예술은 이렇게 다시 시작할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