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삶이 매개하는 예술적 삶
2017. 7회화를 전공하고 설치 작업과 퍼포먼스 위주로 전시와 공연을 병행하던 김재원 씨는 큐레이터 활동을 시작하면서 아티스트 킴후, 큐레이터 김재원이라는 두 정체성으로 작업을 활발히 이어왔다. 그가 돌연 경기도 연천으로 이주해 가드닝 카페 ‘온실’을 열기까지는 건강 문제와 뒤이은 수술 등 힘든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전시와 공연에서 타인과의 비언어적인 소통에 주목했던 그는 반려식물과의 일상을 예술과 접목하며 예술적인 삶의 영역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글·사진 김지승
그의 드로잉 작업을 본 적이 있다. 아주 작은 원들이 서로 연결되고 증식하면서 하나의 뚜렷한 형태를 이루는. 작은 원들은 자라고 자라서 나뭇잎이 되기도 하고, 코끼리가 되기도 했다. ‘여러 정체성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는’ 일련의 작업들은 자신이 아프고, 수술을 받고, 결국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과정과도 연결된다고 그는 말했다. 단순한 통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척추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어떤 병명으로 정체화되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영양분을 제공하며 키우고 있던 몸 속의 것들이 결국 그를 이곳으로 오게 해 식물과 연결시켰다고 했다. 이러한 삶 속 변이를 언젠가 퍼포먼스 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는 웃었다. 건강은 어떠냐는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셈이었다.
최근 식물과의 콜라보 작업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온실’은 공간 자체가 작업 결과물 같다.여기가 이전에는 보신탕집이었다. 4개월 정도 혼자 공간 작업을 했다. 페인트칠하고 의자를 놓고 집에서 키우던 식물을 옮겨왔다. 어릴 때부터 식물과의 관계가 각별한 편이었다. 현재 여기 400여 종류의 식물이 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공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연결고리로 하나둘 갖다 놓다가 점점 주요 오브젝트가 되면서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고 공간을 더 마련했다. 사람들과 식물을 매개로 한 대화, 활동이 일어나면서 상상력의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이곳에 오게 된 과정과 이후 경험하는 소소한 일들이 결국 내가 해온 작업들과 같은 선상에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런 면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일 작업 중인 거겠고.
큐레이터 활동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웃음)식물 배치가 남다른가?(웃음)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지만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가장 좋았던 게 다양한 식물들을 접하고 경험한 거다. 그냥 좋아했던 게 아니고, 내가 아름답게, 미적 기준에 맞게 변형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전지가위를 들고 마당의 멀쩡한 나무를 내 마음 대로 자르다가 혼났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놀이에 가까웠고, 그 다음에는 아침저녁 관리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게 행복했다. 손이 많이 간다. 매일 다르고. 카페로만 운영했다면 몇 개월 못 버텼을 것 같다.
식물을 매개로 어떤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나?
아직 독립적으로 기획해서 진행하는 건 없고,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일들에 참여하고 있다. 재래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같은 문화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일이나, 식물을 매개로 한 재활 프로그램, 아트워크 방식으로 식물을 가드닝하는 작업, 아이들에게 전시기획을 가르치는 일, 자유학기제 수업 등 시도해보고 확장하는 의미의 작업들이다. 특히 모 정신건강지원센터에서 이루어지는 환자들과의 가드닝 수업은 언어적·비언어적 소통 측면에서 예전 작업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공간으로 연결되는 사람들도 다양해졌다. 야생화를 발굴하러 다니는 사람들, 포토그래퍼, 여러 장르의 예술가, 지역 문화 관계자, 박물관 학예사… 그렇게 연결되고 찾아오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삶이자 작업이 되어간다.
‘온실’은 개인적인 건강문제, 귀향, 경제활동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간 나란 사람이 살아온 것들의 총체적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만들어가고 있는 공간이란 의미가 생기고, 예술 영역을 확장하는 실험실, 식물이 가득한 온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대합실, 각자의 이야기가 들어차는 카페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서는 여러 형태의 삶과 이야기가 오고 가고, 그것들이 예술 영역의 확장에 대한 상상과 기록으로 축적되어 간다. 그래서인지 요즘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예술을 사는 이들과의 만남예술의 경계를 흔들다 ‘여러 정체성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는’ 그의 작품 중 지역 예술가의 예술 활동에 있어서 서울과의 차이를 느낀 게 있다면?
오히려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상에서 예술성을 끌어낼 수 있는 부분들이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데,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그 가치를 발견해줄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게 정말 멋있고 창조적인 작업이란 걸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의아했다. 예술성, 예술의 영역에 대한 경직된 사고가 작용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그냥 예술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내 경우 예술의 경계가 오히려 흔들리고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예술의 영역을 가르는 어떤 선이 굉장히 두껍고 넓어졌다는 것이 이곳에 와서 얻은 가장 큰 변화일 수 있겠다.
그 변화가 지역에서의 작업이나 활동으로 이어지나?
그러면 좋겠지만 이곳에서 사람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봐야 할 것 같다. 직접 와서 보고 일상의 예술성, 다양한 콜라보 작업 소재를 발견하고 지역 사회와 연결하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까지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다. 어떤 게 이슈가 될지, 연계해 확장할 수 있을지 아는 거다. 그게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단기간에 보여주기 위한 이슈를 좇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만큼 빨리 소비되고 사라진다.
이곳에서는 관심을 보이긴 하지만 식물을 매개로 한 작업들을 문화예술적 관점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냥 삶의 꾸준한 방식으로 체화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쌓이면 그 거리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일을 늘리면서 그들의 일상이 곧 예술활동일 수 있다는 인식을 나누고, 예술 경계를 확장시키고, 모호하나마 가이드라인을 잡아가는 일을 해보려 한다. 내가 받은 영향이기도 하니까. 거리감이나 불편함 없이 그런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계속 고민하고 있다.
거주 지역과 활동 영역 모두가 지역인 사람들과 지역에서 거주하지만 활동 영역은 서울인 사람들의 차이가 크다. 전자는 아무래도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라, 일단 시스템 적응이 쉽지 않고 필요한 정보들에서 소외된 경우가 많다. 예술인 복지 관련 기금 신청이나 사업 참여 등에 있어 상대적으로 접근 장벽을 높게 느낀다. 젊은 층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신청 절차나 서류 작업은 마찬가지로 어렵다. 참여 절차나 서류 작성을 돕는 기관이 따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생각마저 든다. 지역 설명회나 지역 기관과의 연계 등을 더 활발히 진행해서 지역 홍보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인터넷으로 안내를 받거나 필요한 정보를 찾고 기금을 신청하고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 자체가 힘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서류 절차에 난색을 표하는 분들이 많다.그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공무집행 절차상 정확성과 공정함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 수혜자들이 예술가들일 때, 그들의 특성과 기질, 처한 환경에 따른 유연한 적용이 아쉽다는 말일 거다. 재단에 따라 또, 기금 액수나 사업 성격에 따라 절차가 더 복잡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겠지만, 기준에 접근하기 힘든 사람들에 맞추고 최대한 간소화하면 좋겠다.
예술 활동 영역과 기회 확대 중요지역 예술가의 자생력 기반될 것 지역 예술인 복지에 있어 중점을 두었으면 하는 부분은?
과거 복지 기금이나 사업 선정 결과를 보면 일정한 조건의 군들이 수혜자 리스트를 차지한다.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활동 영역과 기회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는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거나 프로젝트에 따라 오고가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도 수월하다. 지역 예술가들은 활동 가능한 영역과 기회에서 그들과 벌써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게 복지 혜택을 받는 조건까지도 연결된다. 자연히 관련 제도에 무관심해진다. 영역을 넓히고 기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역 지부를 만들거나 기관 문화부 같은 곳과 연계해 지역 예술가와 가까운 시스템을 구축했으면 한다. 지역마다 구심점이 있는 게 좋다. 그래서 스스로 영역을 넓히며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즉, 자생력이 생길 때까지 가까이에서 지역 상황에 맞춰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터뷰 동안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척 다양하다. 소소한 사건들이 생기겠다.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어서 초중생들이 늘 지나가고, 노인들도 많다. 통유리창으로 그들의 시선, 말소리가 다 투과해 들어온다. 여기 카페래. 아냐 꽃집이야. 이런 대화들. 그러면 나가서 둘 다야, 대꾸해 준다. 할머니들이 부담 없이 사갈 수 있는 가격의 화분들을 일부러 밖에 내놓기도 한다. 식물에 대해 참 예쁘다, 하며 가장 자주 감탄하고 표현하는 건 할머니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말을 걸고 말을 받는다.
내가 창밖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반대로 관찰 당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사회복지시스템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다. 동네 쓰레기들을 주어다 집 앞에 쌓아놓는 사람도 있고, 아무 목적 없이 약에 취한 얼굴로 길을 왕복하는 사람, 치매성 우울증을 앓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읍사무소에도 몇 번 찾아갔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내 일상을 정직하게 알릴 수 있을 텐데, 예술이나 복지 이야기를 너무 한 것 같다. 그냥 식물 키우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좋겠다(웃음)
개인적인 것을 녹여내 만든 공간에 시간이 쌓이면서 이 지역의 것들,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들고 있다. 앞서 얘기한 사람들, 직접적인 교류뿐 아니라 내 일상에서 몇 분 동안 내 시선과 감각을 묶어두는 사람들과 쌓인 것들을 2, 3년 후쯤 소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기획자로서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될 텐데, 지역민들과 함께 펼쳐볼 수 있는 것들을 책이 됐든, 전시가 됐든,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든 예술 작업으로 이어보고 싶다. 의식적으로 당장 무언가를 준비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면서 나 몰래 축적되고 자란 것들이 그렇게 예술로 승화되길 바란다. 그 전까지는 타인의 취향과 내 개인의 취향이 만나서 성사되는 모종의 순간들, 여러 형태의 이야기들을 생산해내는 시간으로 이곳을 채워나가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