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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시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으로 ‘찰나의 예술’을 영원으로 만들었다면 디지털 시대, 자신의 작품이 가볍게 소비되기를 원하는 사진가가 있다. 하루하루 건설현장에서 땀 흘리며 노동하는 틈틈이 모바일폰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황태석 작가다. 삶과 예술, 어느 것 하나 분리할 수 없는 예술노동자의 땀내 나는 이야기와 함께해보자.
“건설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근이나 못, 콘크리트가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다가오더라고요. 건물이라는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그 물건들만이 가진 기능성 때문인지, 허투루 안 보였어요.” 그렇게 마감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는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포착한 작가의 남다른 시선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SNS를 통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다양한 매체에 얼굴이 알려졌고 사진가 황태석의 이야기는 삶과 예술의 경계에 선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줬다.
‘노가다’라 불리는 막노동 현장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버거움이 지금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즐거운 현장이 되었으니, 삶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금의 상황이 아직 얼떨떨하고 쑥스럽다는 작가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부지런한 예술가다. 자신이 사는 수유동에서 신설동에 있는 제법 큰 인력사무소까지 가야 한다는 그의 녹록잖은 일상이 궁금하다.
“새벽 4시 20분경에 기상해서 마을버스를 타요. 첫차를 타는데도 인력사무소까지의 거리가 있어 일감이 배정되는 시간에 딱 맞추기가 쉽지 않죠. 보통 5시 30분에서 6시면 일터가 결정되고, 8시면 배정받은 일터에 도착해서 작업에 들어갑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되는 노동의 하루가 젊은 작가에게 신산할 법도 한데, 자못 유쾌하다.
“당장 오늘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선 일당을 주는 노동일이 아무래도 수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죠. 처음 인력사무소에 나갔던 날은 일이 없어 그냥 돌아왔고, 그다음 얻게 된 일은 일당이 18만 원이라 좋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그 일 끝나고 사흘간 쉬었거든요”라는 말에서 당시의 절박함과 노동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열일곱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때 알게 되었다는 그림, 취미로 여겼던 그림으로 인정받으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황태석 작가. 20대 중반에는 그래픽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했는데, 오랫동안 열정을 쏟았던 개발 프로젝트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2년여를 알코올에 의지한 채 보냈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당장 일상을 해결해 줄 출구가 필요했고, 그곳이 공사현장이었다고.
전문적으로 교육받지 않았지만 다른 시선과 감각을 담은 사진들이 황태석 작가의 현재를 증명하듯 그가 모바일폰으로 찍은 공사현장은 이제 그에게 예술 현장이 되었다. 휴식시간 짬짬이 찍은 현장 사진들은 집에 돌아와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는 보정작업을 거쳐 SNS에 올려졌다.
“산만하게 얼기설기한 골조가 주위 경관을 해친다고 가림막을 치지만 우연처럼 배치된 건축 자재며 사물과 사물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었어요.” 현장의 건물 골조, 지하 어둠을 뚫고 일어나는 빛의 산란, 창문틀에 설치된 차폐망, 바닥에 깔린 배관, 전기공사를 위해 늘어뜨린 호일 선 등은 모빌, 혹은 미술 구성처럼 작가의 모바일 프레임 안에서 그대로 예술이 되었다.
“공사장 주위가 보기 좋은 느낌이나 예쁜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처음엔 산업 스파이냐는 오해도 받고, 혹시 부실공사로 신고하려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들었어요.” 사진 찍는 작가로 알려지면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지난해에는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그룹전도 가졌다. 관람객들의 반응도 감사하고 중요했지만, 힘들었던 자신의 20대를 정리하는 느낌이어서 한결 가볍고 홀가분했다는 작가. 자신의 사진을 접하는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단다.
“제 사진이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거리감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작품이니 예술이니 하면 어렵고 무거워지잖아요. 모든 것들이 쉽게 쉽게 소비되는 세상인데, 제 사진도 그렇게 소비돼야 저도 부담 없이 찍고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림 그리며 활동하던 때 예술활동증명을 받고 싶었는데 어렵더라고요. 함께 미술 작업했던 친구는 받았는데 저는 잘 안됐어요.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자격 조건도 갖춰야 하고.” 처음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의 인연을 그렇게 떠올리며 웃음 짓는 작가에게 간편하게 개선된 예술활동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예술인복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예술인도 똑같은 생활인인데, 수입은 다른 생활인들처럼 정기적이지 않잖아요.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지원받을 수 있으면 불안감 없이 작업도 하고 생활도 할 수 있어서 좋죠. 첫 전시회 때 느낀 거지만, 사진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사진 인화 비용이며 액자값에 놀랐어요. 이런 예술활동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는 건데 당연히 좋죠.”
여기저기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최근에 그의 작품을 ‘포토에세이’로 엮어보자는 출판 제안이 있어, 글 쓰는 작업까지 병행하고 있다는 작가는 “5월 출간을 목표로 하는데, 너무 힘드네요. 글은 잘 써보지 않아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미 예술하는 노동자다운 맷집이 있는 만큼 잘할 거란 믿음을 갖게 하는 황태석 작가, 그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특이하고 재미있는 소재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해요. 이번 사진들이 ‘공사현장 프로젝트’였다면, 다음은 ‘쓰레기장’을 생각하고 있어요. 쓰레기로 배출되는 다양한 형태의 비닐봉지에 눈길이 가더라고요. 한때는 용도가 분명한 물건의 포장지로 쓰였지만, 이제는 쓰레기장의 주범(?)이 된 쓰레기.”
테마가 있는 하나의 작업을 ‘프로젝트’라고 표현하는 황태석 작가, 올해로 3년째에 접어든다는 막노동은 언제까지 지속하게 될까. “확실히 정해진 건 없지만, 아직 더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당분간 공사현장 노동은 계속할 예정”이라고 한다. 노동하는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진정한 예술노동자, 황태석 사진가의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