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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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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달 작가

양말 한 짝도 책이 될 수 있을까

2019. 4
아무튼양말

출판사 대표와 미팅을 하던 중, 평소 좋아하는 음악인이자 작가인 요조 씨가 화제에 올랐다. 그가 떡볶이를 주제로 책을 쓰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세상에, 순대도 어묵도 곁들이지 않고 오로지 떡볶이 이야기만 가래떡처럼 쭉쭉 늘어놓는 책이라니. 깜짝 놀라 물었다. “대박. 어떻게 떡볶이로 책 한 권 분량을 쓴대요?” 그러자 대표님이 당황한 듯 눈을 몇 번 끔벅이더니 하는 말. “작가님은… 양말로 책 한 권 쓰셨잖아요?”

맞다, 그랬다. 전국 아스팔트 도로에서 달걀 프라이 조리가 가능할 만큼 뜨거웠던 지난여름,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커피가 젖과 꿀처럼 흐르는 카페를 전전하며 나는 양말에 대해 썼다. 줄무늬 양말, 캐시미어 양말, 짝 안 맞는 양말, 양말 도깨비, 양말 서랍 정리 꿀팁… 카페 안 모두가 맨발인데 나 홀로 리넨 양말을 종아리까지 올려 신고서는 하루는 발가락 양말과, 다음날은 캐릭터 양말과 씨름했다. 그 결실이 바로 작년 12월에 출간된 『아무튼, 양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러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써냈더라.

누가 써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직접 기획제안서를 작성해서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양말로 아무튼 시리즈에 참여하고 싶다고. ‘아무튼’은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다. 즉, 지면을 빌려 마음껏 덕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중학생 때부터 발목 양말을 모아온 19년 차 양말 애호가이자 4년 차 작가로서 탐내지 않을 수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막상 원고를 써보려니 쉽지 않았다. 양말은 책의 소재로 삼기에 좀… 하찮지 않나 싶었다. 배춧잎 한 장이면 마트에서 10족 한 묶음을 사서 몇 달씩도 돌려 신을 수 있는 게 양말이다.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생필품에 가까운 아이템. 사소하다 못해 대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양말에 대해 써본들, 과연 읽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안고 양말 서랍을 열었다. 풀꽃이 수 놓인 프랑스제 양말. 엄청 예쁘지만 남들 눈에는 그리 대단치 않겠지. 일본 직조기술의 집약체인 시스루 패치워크 양말. 엄청 섬세하지만 그래 봤자 대량생산품이다. 엄마가 선물해준 땡땡이 양말. 엄마가 한 코 한 코 떠준 거라면 모를까…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한 켤레를 집었다. ‘무지개의 포옹’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양말이었다. 이름처럼 다양한 빛깔의 실이 뒤섞여 발목을 감싸는 디자인인데, 그러데이션 짜임으로 직조하기 때문에 양말마다 색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내 ‘무지개’는 유독 보랏빛이 돌아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아마 누군가의 무지개는 노란색이 더 섞여서 발랄한 느낌일 테지. 말하자면 하나하나가 세상에 하나뿐인 양말인 셈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가 빚어내는 약간의 특별함. 무지개의 포옹을 손에 꼭 쥐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라면 한번 써 봐도 좋지 않을까.

일상에서 거창한 행복에 압도당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로또 당첨이라든지, 로또 당첨이라든지… 보통은 자잘한 즐거움을 살뜰히 주워 담아서 그날 행복의 총량을 잴 터다. 플랫폼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이 왔다, +1. 월간회의가 기적처럼 30분 만에 끝났다, +3. 앙버터가 맛있는 빵집을 발견했다, +10 등등. 내게는 아침마다 양말을 고르는 일이 자잘한 행복 포인트를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흐린 날엔 청량한 푸른색 양말을, 울적할 땐 반짝이 양말을, 성탄절엔 루돌프 양말을, 벚꽃이 필 즈음 꽃무늬 양말을, 여름휴가 첫날엔 수박 양말을 챙겨 신곤 했다. 양말을 바꿔 신는 정도의 사소한 차이가 평범한 오늘을 어제와 다른 특별한 하루로 만들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원고를 풀어나갔다. 일상에서 겪은 평범하고 자잘한 에피소드를 그날의 양말과 연결하자 조금은 남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모처럼 잡힌 약속에 소중히 아껴둔 시스루 양말을 꺼내 신고는 올이 나갈까 봐 벌벌 떨면서도 행복해한 일. 최애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늘 깨끗한 흰 양말만 신었다는 일화를 책에서 읽고는 흰 양말 열한 켤레를 꺼내 푹푹 삶았던 일. 벌이가 들쭉날쭉한 프리랜서 주제에 다음 달 보험료를 못 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수입 양말을 왕창 질러버린 일. 남동생이 벗어던진 발가락 양말을 빨면서 짜증이 솟구친 일. 교토에서 예쁜 양말을 발견하고 침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본 친구가 밤색 양말을 깜짝 선물해준 일. 내 발바닥에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일상의 희로애락이 어느덧 남들과 나눌 만한 활자로 변해 겹겹이 쌓였다.

“이족보행 영장류이길 거부하는 인간 지네의 양말 예찬”이라는 카피를 달고 출간된 『아무튼, 양말』은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물론 폭발적인 판매고를 기록하며 부와 명성이 곤란할 정도로 쌓이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쓴 에세이 가운데 가장 많은 리뷰가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비교 대상인 예전 스코어는 슬프니까 밝히지 않겠다). 해시태그를 검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책을 다 읽고서 양말을 사버렸다는 후기를 볼 때면 어찌나 뿌듯한지. 양말을 고르는 작은 즐거움에 전염된 사람들.

“행복은 양말이다. 양말과 함께라면 행복은 언제나 제철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격인 ‘제철 양말’ 꼭지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어느 순간에나 확실히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행복을 가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경우 그것은 양말이었다. 프리랜서 일이 고달프고, 생활비가 모자라서 서럽고, 기똥찬 문장을 떠올리지 못해 괴로운 날에도 서랍에서 양말을 꺼내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행복할 수 있었다. 공들여 치장한 발목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발목을 내려다보는 내 기분이 중요했다. 이 책 원고를 쓰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남들 눈에는 하찮기 그지없는 무언가가 나를 행복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재능이 있다는 믿음 없이 붙들고 있는 글쓰기라는 직업, 혹은 쓸데없다고 취급받는 양말 수집이라는 취미처럼. 남들 시선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족보행 영장류이길 거부하고 인간 지네를 자처하며 양말을 126켤레나 모았고, 그 ‘썰’만으로 책 한 권을 써냈는걸.

얼마 전 ‘노네트’라는 일본 브랜드의 양말을 구입함으로써 127켤레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무채색인데도 무늬의 입체감 덕분에 화려하게 느껴지는 제품이다. 양말가게 사장님이 설명해주시기를, 이 양말을 여간 꼼꼼하게 만드는 게 아니란다.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겹겹이 패턴을 짜 넣는데, 공장에서 기계로 돌리는 데도 한 시간에 두 켤레밖에 생산하지 못할 정도라고. 양말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 일인가 싶다. 그러면서도 감동해버려 4만 3천 원을 지불했지만. 양말 같은 사소한 품목에 꽂혀 피 땀 눈물을 쏟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멋지다. 그렇게 생산된 양말이 바다 건너 양말 애호가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도 귀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양말과 닮았다. 누구나 신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양말처럼,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특별하다 생각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화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바짓단 사이로 살짝 보이는 양말이 패션을 완성해주듯이, 일상의 작은 이야깃거리가 삶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다른 이의 이야깃거리도 너무 궁금하다. 이를테면 연필 한 자루, 짜파게티 한 봉지에 담긴 사연들. 우리 보통 사람들이 활자를 통해 부지런히 서로의 일상과 애호를 공유하면 좋겠다. 그렇게 1인 1아무튼 집필의 그날을 꿈꾸며, 일단은 『아무튼, 떡볶이』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