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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5

20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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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가 예술가를 위한
낭만계약서를 만드는 이유
글 강정아(문화예술기획자)

〈미래를 여는 예술문〉은 서울청년예술인회의1) 에서 진행하는 스터디로, 일종의 선언문을 제작하자는 의도로 호기롭게 시작한 예술가 모임이다. ‘예술은 노동인가’의 주제로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했고, 웹진 《숨은참조》를 통해 2020년부터 글을 기고하면서 2021-2022년부터는 〈미래를 여는 예술문-예술가를 위한 낭만적인 계약서〉 작성에 매진하고 있다.
‘미래를 연다’라는 다소 추상적인 말에서 시작한 이 작업은 제도와 정책에서 ‘예술인’이 묘하게 비끌리는 현상을 문제화하기 위해 문화예술 ‘현장’의 특수성을 예술인 개개인의 경험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필자의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다. 문화예술기획자로 활동하면서 느끼는 이 ‘일’의 모호성은 시간에 따라 노동값을 정할 수도 없고, 사회보장시스템에 속하지 못한 채 묘하게 이탈되는 불안함을 동반했다. 사실 이러한 한계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삶 속의 이면을 살피고 연구하는 기획자에게는 오히려 묘한 동력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기획자의 직업의식이 사회 구조의 차이가 가진 간극과 이면을 포착하고 공공과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일’로 계약서에 정립하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일

소위 문화예술 ‘현장’들은 공통적으로 특정 근무시간과 장소, 공간이 정해져 있지 않거나 일이 단기적·일시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대해 예술문의 구성원인 박선영은 「나의 신념이 누군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웹진 《숨은참조》, 2021.7월호)2) 에서 독립영화 현장에는 ‘좋아서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당연히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고, 현장에서 예술인이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조차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창작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대처 매뉴얼의 부재, 연습 과정 속에서 창작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여기에 대한 저작권의 문제, 예술인을 증명하기 위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가입기준과 인정 투쟁을 둘러싼 질문을 던지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예술가를 위한 낭만적인 계약서〉(이하 낭만계약서)를 작성해보자는 기획이 출발하게 되었다.
낭만계약서를 제작하면서 우리는 ‘계약’ 체결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계약을 둘러싼 약속의 전제가 되는 영역에서의 신뢰에 대한 당위를 찾아내고자 했다. 낭만계약서는 예술을 ‘일’로 증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을 계약서로 정립하려 했을 때 발생하는 간극을 드러내려는 작업이다. 계약서 자체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창작 영역에서의 계약이나 일은 협업과 협력이 필요하고, 협업과 협력은 계약 당사자 상호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 이것을 구체적인 계약서 항목으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계약이 표준계약서 형태로 이뤄지고 세부적인 것을 기재하기보다 ‘합의한다. 논의한다.’ 등으로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막상 일을 하며 의문이 생길 경우에도 대부분 눈치코치 혹은 경험에 의거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게 된다.

창의적이고 즐거운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한 ‘낭만계약서’

예술문의 구성원들은 영화, 공연, 시각, 행정기관에서 일하며 각자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왔다. 기획자가 아티스트와 계약서를 체결할 때, 아티스트가 기획자 또는 관에 제안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기관에서 아티스트 또는 기획자와 계약을 체결하는 상황에서 겪는 입장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경험적 차이에 근거해 낭만계약서는 세부적인 계약의 항목을 정하기보다 창의적이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염두를 두었다. 예를 들어, 예술 노동에 대한 시간과 일수를 구분 짓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노동에 관한 조항에 협의 기준 항목을 만들었으며 시급에 대한 수식, 일수 및 시간을 한정시키면서 오버 시간을 정하는 방식이라든지, ‘기본적인 식사시간이 포함되어 있다’와 ‘연습일수와 창작일수 관련해 상호 협의가 필요하다’ 등의 조항을 세부적으로 넣었다. 기본적이고 당연한 사항을 낭만계약서에 포함한 것은 협의와 합의의 조항이 가진 유연함을 구체적인 대화와 논의를 이끌기 위한 장치로 작동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내부 스터디를 거치며 표준계약서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조항을 검토할 때 예술청에서 진행한 ‘예술인 법률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업무의 컨디션을 조율하고 일을 하기 전,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계약서가 가진 무게감에 정작 나의 컨디션을 배려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계약서라는 무게감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또 구체적인 계약 조항 값을 설정하기보다 활동하는 장르마다 필요한 업무 조항을 살펴보기 위해 한 달간 온라인 설문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창작자와 장르와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른 조항을 다 목록화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 과정을 거쳐 ‘오히려 개인이 계약서에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구성을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낭만계약서가 예술인 개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기능으로 제작되면 어떨까?’라는 것으로 아이디어가 모였다. 그렇게 낭만계약서의 내용은 계약서의 항목을 세부적인 역할로 나누기보다 예술가 스스로의 컨디션을 조율하고 협의를 통해 이뤄져야 할 업무와 관련,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담게 되었다.
2022년 올해에도 예술문은 낭만계약서에 창작을 둘러싼 협력과 협업을 둘러싼 관계를 짚어내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예술 작품과 산업을 주축으로 다양한 주체(엔지니어, 기술자, 아티스트, 아트에이전시)와 기관과의 창작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살펴볼 것이고, 자신의 취향, 일하는 조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참을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담을 것이다.
이렇게 낭만계약서를 작성하며, 우리는 계약서를 둘러싼 ‘노동 환경’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보이지 않는 예술-노동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 예술 노동은 쓸모 여부로 따지는 자본주의적 존재 방식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 예술가의 ‘일’에 대한 정의와 재설정 작업, 그리고 창작이 상호간의 신뢰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과정이 낭만계약서에 섬세하게 담겨지길 바란다.

1) 서울청년예술인회의는 문화예술 현장의 개별화된 목소리를 모으고 담론 형성 및 정책 제안 플랫폼의 역할을 시도하며 서울문화재단과의 협력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s://url.kr/a6y2pt

2) 「나의 신념이 누군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박선영, 2021,7월호 https://url.kr/7q3o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