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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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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기획
나는 원로예술인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피에로 인생

글 박웅 배우

배우로 살아가는 삶

나는 배우로 살아온 것에 감사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가끔 다른 일을 했다면 지금 나의 모습이 어땠을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 못했으니 허전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는 이유는 배우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배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연극영화과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연극으로는 생활하기 힘들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같이 연극을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는데 아들까지 한다고 하니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봤다. 내가 살아온 방향이 아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게 아닐까 하고. 유전자는 물론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저 좋을 뿐이다. 조금 고생스러울지라도 하고 싶은 걸 계속하는 모습이 다행스럽기도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럴 일은 없지만, 그때 아들의 선택을 반대했다면 아들과 〈수상한 수업〉으로 한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희로애락을 지나 만나는 카타르시스

배우란 무대에서 연극을 하며 여러 형태 작품 속 인간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극작가가 만든 상상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작품에 형상화된 인물이 배우를 통해 똑같은 인물로 다가가는 것은 배우에게 주어진 첫 번째 중요한 작업이다. 지금까지 연극, 드라마, 영화 등에서 어떤 인물을 연기했는지 되돌아보면 늘 아쉽기도 하다. 관객에게는 실제 연기한 배우보다 작 중 인물의 성격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기에. 작가가 그린 인물이 배우의 연기를 통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연극, 드라마, 영화 등에서 작가가 그린 가상의 인물은 배우를 통해 무대 위에 창조된다. 그 인물이 사람과 상황에 따라 좋게도, 기억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인물로도 남게 된다. 그저 배우는 묵묵히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의 성격에 다가가기 위해 연기를 할 뿐이다. 비로소 관객은 배우의 연기를 마치 실제 인물처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연극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접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봐도 기분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을 셀 수 없이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기분 좋은 일만 접하고 살수는 없지 않은가. 희로애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생활이다. 즐거운 일이건 기분 나쁜 일이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할 뿐이다.

연극에서 배우의 역할은 이러한 것의 정화작용에 일조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극은 관객들에게 분별력을 제공한다. 연극은 카타르시스,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연극이 이러한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연극이 주는 에너지

배우를 흔히 ‘연극의 꽃’이라고 한다. 한 편의 연극이 공연되기까지는 천신만고의 리허설과 시간을 거친다. 2, 3개월의 연습은 기본이다. 막이 오르기도 전에 배우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곤 한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극장의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시선이 매섭다. 배우는 허허벌판에 내몰린 새끼 양처럼 도망갈 길이 없다. 연극은 관객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배우는 죽어도 무대 위에서 죽자.’ 스스로 되뇌자 다시 기적 같은 힘이 솟구친다. 불이 꺼지고 박수 소리가 진동한다.

56년간 무대에 오르고 박수를 받기까지 참 많은 행운을 만났다. 80년대 초부터 2000년도에는 극단 자유를 통해 다양한 나라로공연을 다녔다. 20여 년 가까이 연극 관련 국제행사,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해외여행조차도 흔하지 않았을 때다. 정부의 도움 없이 극단 자체의 힘으로 매년 무대에 올랐다. 세익스피어의 〈햄릿〉, 가르시아 로르카 〈피의 결혼식〉을 각색하는가 하면 창작극을 공연했다. 20명 남짓한 단원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국작품을 한국어로 연기한 그때야말로 한류의 시초가 아닐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1991년에는 동료들과 연극배우협회를 만들었다. 친목 위주의 단체뿐이던 그때, 협회를 설립했고 감사하게도 1대, 2대, 3대 이사장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배우, 작가, 연출, 스텝 모두 속해있는 사단법인 연극협회의 19대 이사장에도 선출됐다. 그 당시에는 열 일 제쳐두고 배우보단 연극하는 한 사람으로서 연극계의 풍토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연극〈어느 하오의 인생〉
  • 연극〈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배우, 영원한 피에로

연극은 역사적인 장르다. 비록 사람들과 멀어졌을지라도 연극이 갖는 힘은 세월이 흘러도 살아가면서 가장 독특한 분야로 존재하고 있다. 연극은 배우가 하는 일 중에서 굉장히 기본적인 작업이다. 묘하게도, 공연예술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과학이 아무리 발달할지라도 연극은 현장예술로서 우리의 일상과 완전히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늘 하는 말이다. “영화나 TV는 어제의 예술이고, 연극은 오늘의 예술이다.” 늘 관객들과 현장에서 호흡하는 작업이 연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 정신도 몸도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자만이 배우의 길을 갈 수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자신을 굳게 믿는 마음. 박웅의 배우 인생, 힘들긴 했지만 즐겁게 잘 지나왔다. 지금도 무대에 설 수 있으니 어느 직업에 비할 수 있겠는가. 배우는 나이가 없다고 한다. 영원한 청춘, 나이를 잊고 사는 배우. 사랑하며 살련다. 내 사랑 피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