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로고예술인 로고 모바일예술인 로고 모바일

vol.34

2019. 9

menu menu_close menu_close_b
구독 신청
닫기
구독신청
대화
김용우 대표

휠체어무용의 시작을 열고, 미래를 꿈꾸다

〈K-Wheel Dance Project〉 김용우 대표

“더 나은 당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매일 당신의 기록을 깨뜨려라. 그러면 성공한다.” 저명한 연설가인 윌리엄 보엣커의 말이다. 사람들은 어제보다 나은 나를 꿈꾸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 ‘휠체어무용’이라는 분야를 개척,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온 이가 있다. 바로 김용우 무용가다. 그는 1997년 캐나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여행을 하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로 휠체어에 앉아야 했다. 18년의 세월 동안 무대에 오른 그에게 휠체어는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이제는 K-Wheel Dance Project를 이끄는 대표로서, 장애예술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무용가 김용우를 만나봤다.

얼마 전, 장애인문화예술축제 ‘A+ 페스티벌’ 개막식에 축하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세요. 공연을 마친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성남시에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12월 3일, 성남시청에서 ‘꽃춤’이라는 공연의 무용 관련 수업이지요. 휠체어 타시는 분들한테 재활이나 운동 말고도 무용이라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작년 초에는 청각장애인 1명, 휠체어무용가 1명, 스탠딩무용가 2명으로 이루어진 K-Wheel Dance Project도 시작했습니다. K-Wheel Dance Project를 통해 창작 작업 외에 기획, 행정운영까지 경험하죠. 공연과 달리 어렵지만, 다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작년까지 대학원 다니고, 창작 작업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K-Wheel Dance Project의 대표가 되면서 더 바쁘셨을텐데,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일반무용가나 안무가를 만나면 그들의 기술이나 지식도 궁금했지만, 예술적인 소양이나 그들만의 가치관이 있더라고요.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도 다르고. 궁극적으로 예술이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 같아요. 마침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협동과정이 있었고, 전반적인 예술학을 공부하며 시야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론적인 인풋을 경험하니, 작품 구상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그것이 창작 작업으로 이어졌고요.

원래는 경영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양한 무대 경험을 하셨다고요.

지금처럼 무대에 오를 생각으로 했던 활동들은 아니고요, 대학교 때는 응원단으로 활동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부대별로 나눠, 전역하기 전까지 동기들이랑 크리스마스 공연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후, 1년 2개월 정도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동생이 있는 캐나다로 넘어가 더 재미있게 영어를 배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영어로 수업하고 마지막 이틀 동안 연극을 선보이는 과정이 있더라고요.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연극 ‘영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고,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어요. 이틀 내내 100명 규모의 공연장이 가득 찼습니다. 그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날 교통사고가 났죠.

사고 이후에는 오랜 시간 독하게 재활치료에 전념하고, 방황도 하며 시간을 보내셨다고요.

하루아침에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캐나다에서 사고가 났고, 캐나다에서 재활치료를 시작했어요. 캐나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재활 프로그램과 운동법을 권했거든요. 또, 제가 장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계들이 불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후, 사회적인 분위기에 갇힌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때는 21년 전이었으니까요. 많이 고민하다, 치료 대신 사회로 나오게 됐어요. 큰 결심이었지만 무엇인가를 하기엔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휠체어 댄스스포츠를 접하게 됐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막연히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휠체어 댄스스포츠의 처음을 함께하신 거잖아요. 한 분야를 개척하기까지 힘도 들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춤을 춘다는 개념이 없었죠. 장애계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많은 분이 새로운 분야라 관심을 가졌지만, 선뜻 같이 하자거나 무대를 찾는 사람은 없었어요. 장애인분들 조차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으니까요. 그런 걸 많이 바꾸려고 했어요. 장애인이 무대에 올라갔기 때문에 관심 갖는 게 아닌 무대 자체에 감동받도록. 그때는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심장이 쪼여올 정도로 두려웠지만,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재미있게 공연하고 있어요.(웃음) 초창기에는 사회적인 지원과 공연비에 대한 개념도 없었어요. 지금은 공연자도 많고, 공연비도 일상화됐지만요. 알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어디든 갔지만, 대부분 신기하게 보는 듯한 느낌이 강했어요. 공연환경이나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10여 년 전부터 이미 다른 나라는 휠체어 댄스스포츠의 역사도 길었다고요. 그에 반해, 한국은 시작하는 단계였잖아요. 그럼에도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셨습니다.

20~30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나라들이 많았습니다. 2~3년의 경력을 가진 제가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던 이유는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에요. 빠른 스피드, 턴 그리고 표정연기. 특히 표현력에 집중했어요. 그 표현을 하기까지 2년이 걸렸지만, 무용계로 오고 나서도 그 과정들은 굉장한 도움이 됐습니다.

휠체어 댄스스포츠 국제대회를 휩쓸며 해외 공연도 다니다가 무용가, 안무가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요?

2006년에 중국장애인기예단이 3일 동안 한국의 장충체육관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같이 무대에 올랐는데, 장애인이 저렇게 크고 멋있는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거에 놀랐죠. 이듬해에 영국 ‘캔두코 댄스 컴퍼니’의 공연을 보며 10분 이상 계속되는 현대무용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댄스스포츠는 1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걸 보여줘야 했거든요. 이것을 계기로 ‘빛소리친구들’을 창단하게 됐고, 안무가도 초빙하며 현대무용을 시작했죠. 2009년에 창단 공연과 선수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워, 무용에만 집중하게 됐습니다.

다양한 공연에 영감을 받으며 휠체어무용의 한계를 넓혀오셨어요. 대표님은 휠체어의 어떤 매력을 느끼신건가요?

휠체어를 타면 생각보다 자유로워요. 땅에서보다. 바퀴가 주는 스피드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춤을 추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무대에서의 몰입감도 있고요. 공연을 통해 제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된거죠. 또, 휠체어무용을 하며 스포츠나 예술을 하는 많은 장애인분도 만났는데,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대단하시죠. 매번 저에겐 큰 자극이 됐습니다.

예술가로서 몰입을 경험하기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도 궁금합니다.

음악, 파트너의 시선, 관객들의 함성, 주변 선수들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고 해야할까요. 모든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이후로도 2~3번 정도 있었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2005년 홍콩 아시아 휠체어 댄스스포츠 대회 첫 우승입니다. 사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가했어요.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홍콩까지 가야하니 연맹에서도 반대가 있었고요. 제가 팀을 꾸리고, 인솔해서 갔습니다. 기적적으로 우승했고, 그때 마침 KBS 수요기획 PD님도 동행했던 터라 방송으로도 많이 알려지게 됐어요. 그때부터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

무대 위, 공연을 통해 대표님이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면요?

무용계를 보면 많은 무용작품이 있지만, 대중이 쉽게 접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공연을 보러 가면 예술계 관계자를 더 많이 마주치니까요. 저는 행사나 강연으로 대중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습니다. 어떤 관점이냐에 다르지만, 예술의 대중화로 본다면 대중들이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창작 작업을 하다 보면 어렵게 흘러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을 위한 공연과 행사는 쉽게 풀어내려고 해요. 보고 즉각적으로 “멋있다”, “재밌다”, “보기 좋다”고 생각될 수 있게. 예술의 틀이 강해서 대중에게 풀어내는 걸 꺼려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장애예술이 그 중간 부분을 분명히 하고 있고, 관객분들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용우 대표가 처음으로 창작한 1시간 공연의 작품 ‘Dreamer 中 춤추는 時’, 2015

2003년, 처음 휠체어 댄스스포츠로 시작한 대표님과 지금의 대표님을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공연할 때, 휠체어에서 내려오기까지 10년이 걸렸네요. 휠체어무용이니 관객들 앞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2012년에는 처음으로 휠체어에서 벗어나 바닥에서 춤을 추었고, 작년 6월에는 바닥에서 시작해 춤을 추면서 휠체어에 다시 올랐습니다. 제가 가진 공연의 한계를 점점 넓혀왔죠. 2015년에는 처음으로 제 창작 작품들로만 1시간 공연을 했어요. 일반무용가도 학창시절을 지나 개인창작 공연을 하기까지 12년 정도 걸리잖아요. 늦게 시작했지만, 마찬가지로 일반무용가가 경험한 시간을 다 겪은 것 같아요. 지나고 나니 그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우리나라 최초의 휠체어 무용가, 휠체어무용의 전설라고 불리며 장애무용계를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앞으로 대표님은 어떤 모습일 것 같으세요?

삶이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는 않잖아요. 지금처럼 방향이 닿는 대로 공부와 창작 작업을 계속할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시작은 잘하는데 마무리는 잘 못해요. 용두사미라고 하죠.(웃음) 그래도 오래 해온 것이 무용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시도를 했던 것 같아요. 완성하거나 마무리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작하고 열어가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제는 댄스스포츠를 했던 친구들이 무용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어요. 성남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처럼 많은 이가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열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열어가다 보면 열에 한 명은 무용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 장애예술계를 지켜본 한사람으로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많이 바뀌고, 정책도 보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년간 굉장히 많은 변화를 실감했기 때문에 감사하기도 하고요. 장애인문화예술축제 ‘A+ 페스티벌’를 예로 들자면, 매년 진행되는 장기적인 그 흐름에 맞춰 장애예술인들도 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게 됐어요. 이러한 지속적인 프로젝트가 많아지면 지원정책도 이어지지 않을까요? 장애예술인의 특성상, 특히 무용계는 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예술가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인 스스로의 고민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그들이 장기적인 교육을 받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의 깊이와 폭을 넓혔으면 좋겠고요. 그로 인해 전문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고, 그들이 좀 더 깊이 있는 예술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