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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3 2016. 6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홍승기 변호사

예술계, 불공정, 예술가의 권리

2016. 6
칼럼사진

예술인 복지법을 만들던 무렵 법의 내용이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정관에 대하여 의견을 달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그때마다 퉁명스럽게 성의 없이 몇 마디하고 말았다. 가엾은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 여야가 전격적으로 입법을 하였다는데, 입법 과정이 할리우드 액션과 흡사하였다. 국회의원들이 한 건 했다고 으스대는 모습은 눈에 선했으나, 철학도 재원도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이미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는 마당에 예술인에게 이중 복지를 하겠다는 근거도 애매하고,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바에야 재정부처가 업무상 배임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술가를 위해서 따로 돈궤를 열 리가 없다. 그래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불공정 계약에 대처하기 위해 분쟁조정제도를 만들겠다고 할 때도, 신문고를 설치하겠다고 할 때도 짜증만 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대학로에 문을 열었으니 우선 대학로 예술가들이 수혜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사실 대학로 제작자의 궁핍한 사정도 뻔히 보였다. 쓸데없이 판만 벌인다는 생각에 불뚝불뚝 부아가 치밀었다.
예술인 복지 논의는 20년도 더 이전에 연극계에서 나왔다. 친한 연극인이 프랑스와 독일의 예를 들며 논의에 참여하라고 권했으나 그때도 냉소를 날렸다. 통계자료로는 연극인 연 소득이 수백만 원이라는데, 그들이 어떻게 매일 대학로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전에는 연극인의 복지 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심술을 부렸었다.

예술인 복지법이 개정되었다. 배우든 스텝이든 서면계약을 하여야 하고 그 계약은 공정하여야 한다는 점이 내용이다. 서면계약 원칙의 입법화에 대하여는 나름 소회가 있다. 1991년 변호사 개업을 하자마자 한국연극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따라지의 향연〉에서 뻬뻬니에로역(役)을 맡은 이후 〈춤추는 벌레〉, 〈배비장전〉 등에 끼여 몇 번 무대에 섰던 추억이 가슴에 소복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연극협회 자문변호사로 위촉되었다는 월간 〈한국연극〉 기사가 나가자 ‘계약서 안 썼는데 출연료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말로만 한 약속, 즉 구두계약도 계약이다. 우리 민법은 매매, 임대차, 고용, 증여 등 여러 가지 계약 유형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증여계약’에서만 ‘증여의 의사가 서면으로 표시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각 당사자는 이를 해제할 수 있다’고 하여 구두계약의 효력을 제한한다(제555조; 참고로, 영미 계약법에서는 ‘증여’는 계약이 아니다). 이 외에 민법에서 서면계약을 요구하는 규정이 없으니 구두계약이라고 하여도 계약의 효력 그 자체에 서면계약과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문제는 구두계약은 입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입증을 위해 증인을 세워야 할 텐데,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편집해서 기억한단다. 그래서 기억대로 증언한다고 확신하는 증인이라 하더라도 그 증언을 선뜻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의도적인 위증의 위험도 적지 않다. 결국 ‘증인은 가장 나쁜 증거’가 되고 만다.

대학로에서는 오랫동안 동지적 신뢰가 공연제작의 바탕이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계약서를 쓰냐?’는 의식이 바닥에 있었고, ‘서로’ 계약서를 부담스러워도 하였다. 그래도 형제적 유대, 동업자적 유대에 따른 나름의 질서는 유지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무(無)계약서의 질서’를 뒤흔든 사건이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이른바 ‘사비타’ 사건이었다(대법원 2005. 10. 4. 자 2004마639 결정). 〈사랑은 비를 타고〉의 제작자는 자신이 뮤지컬 기획 아이디어를 내고, 작가와 음악감독을 섭외하고, 연출 붙이고, 연습장 빌리고, 배우도 모았으니 저작권은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비타 판결 이전에는 모든 제작자가 그렇게 생각했을 테고, 배우와 스태프도 그렇게 여겼을 법하다. 그런데 사비타 사건을 담당한 법원은 고심 끝에 공연물인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는 결합저작물이고, 제작자는 창작적 기여를 하지 않은 이상 저작권자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합저작물’이란 단독저작물이 느슨하게 모여서 함께 이용되는 상황을 말한다. 뮤지컬은 작가의 대본, 안무가의 안무, 음악감독의 음악, 조명감독의 조명디자인, 미술감독의 무대 등 각 창작자의 단독저작물이 한꺼번에 이용되는 관계라는 뜻인데, 전체 공연물에서 각 창작자의 기여분을 다 걷어내면 남는 것은 제로(zero)가 된다. 법원은 제작자(producer)는 창작자(creator)가 아니므로 저작권법의 원리로는 저작권을 가질 수 없고, 각 창작자들과 ‘계약’을 통하여 저작권을 넘겨받거나 아니면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독점권을 확보하였어야 했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대법원까지도 합세하여 뮤지컬의 성격을 이렇게 분석하자 충격을 받은 대학로 제작자들이 이미 오랜 기간 자신이 무대에 올리고 있는 작품에 대하여, 부산하게 저작권 계약을 하였다더라는 후문이다.

연예산업이 커지면서 연예인 전속계약의 불공정성이 사회문제가 되었었다. MBC TV 〈PD수첩〉이 “연예인 계약은 노예 계약”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제작사를 성토하자 연예인의 처우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수차 직권조사를 하고 행정명령을 발동한 후, 2009년 대형 연예제작사들의 반발을 극복하고 ‘가수용/연기자용 표준계약서’를 발표하였는데 이후 업계의 계약행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요즈음은 대부분의 연예계약이 표준계약서에 따라 체결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개입 없이, 업계 내부에서 스스로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하여 본격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한 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스태프의 미지급임금에 대하여는 신문고를 가동하여 해결했고, 기타 불공정행위에 대하여는 공정거래소위원회를 통하여 해결방법을 강구하였다. 공정거래소위원회는 제작가협회, 시나리오작가협회, 스태프조합 등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되어 민감한 사안에는 얼굴을 붉혀가며 의견이 오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쨌든 제작사의 행태가 불공정하다고 결론을 내리면 시정을 권고하고, 시정권고에 계속 불응하는 경우에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사업이나 정부출자 펀드의 수혜대상에서 배제하고, 불공정거래 사실을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시하여 제작사를 압박하였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이러한 조치에 법적 근거가 없었으니 시빗거리가 될 여지도 있었으나, 영화진흥위원회 내규로나마 근거를 마련하고 공격적으로 시행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의외로 즉각 사업효과가 눈에 보였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근거를 마련하고자 문체부에 요청하였더니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회신이 왔었다. 예술인복지법의 개정 내용을 보고, 그 답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신설된 ‘예술인복지법 제6조의 3’은 사업자가 시정조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영화발전기금, 문화예술진흥기금, 방송통신발전기금 등의 재정지원을 중단하거나 배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산업 내부인사들의 주도로 여러 종류의 표준계약서를 생산하여 온 점도 칭찬이 아깝지 않다. 산업에 문외한인 법률전문가들끼리 짧게 고민하고 던져 주는 표준계약서보다는 산업 내부에서 생산된 표준계약서가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방송업계의 불공정거래 관행도 빼고 갈 수는 없다. 논의의 발단은 외주제작 방송프로그램에 대하여 지상파 방송사가 계약을 통하여 저작권을 포괄적으로 이전받아 가던 계약 관행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경부터 외주제작사는 외주제작사협회를 중심으로 불공정한 외주제작 관행을 개선하고자 ‘모범계약서(안)’을 제시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지상파 방송사는 애써 못 들은 척 하였다. 한참 세월이 흘러 2015년에, 기여분에 따른 저작권 분배를 원칙으로 한 표준계약서가 공표되는 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였다(방송프로그램 제작 표준계약서 제9조). 영세하거나 악덕한 외주제작사가 생계형 작가와 연기자의 보수를 떼먹는 폐해도 심각하다. 작가와 연기자는 껍질뿐인 제작사(혹은 문화산업전문회사) 대신 재정이 건전한 방송사가 책임지기를 희망하였다. 표준계약서에서는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게 원고료, 출연료에 대한 지급보증보험 증권제출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범위에서' 방송사가 제작사의 미지급분을 직접 지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7조).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도로 2015년 이후 영화, 출판, 공연예술, 방송, 만화 분야에서 표준계약서가 발표되었고, 계속하여 장르별 표준계약서를 연구 중인 것으로 안다. 영화계, 방송업계, 공연업계 등 분야마다 불공정거래의 양상에도 차이가 있으므로 해결방법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나 방송은 산업성이 강하므로, 사업자 측을 압박하면 불공정성을 해소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공연계에서도 뮤지컬과 정극의 시장이 다르고, 무용계는 더욱 산업과 친하지 않다. 장르에 따라 표준계약서의 효과가 즉각 나타날 수 있는 영역도 있고, 그렇지 않은 영역도 있는 것이다. 산업과 친하지 않은 순수예술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러한 장르가 예술가 일방의 희생 위에서 굴러가도록 둘 수는 없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근대민법의 대전제인 바에야 표준계약서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표준계약서의 공표가 시장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은 명백하다. 나아가 서면계약의 강제를 전제로 한 개정 예술인 복지법이 모든 불공정거래의 행태를 즉각 예술계에서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인 보호를 위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출범은 로스쿨의 시작과 닮았다. 오랫동안 논의만 무성하다가 잊혀질만한 때 전격적으로 시행된 점이 그렇다. 로스쿨에 대하여는 조직적 저항과 황당한 음해가 있다. 그러나 국가적 과제로 시작하였으니 잘 되어야 하고, 이미 6천 명의 변호사를 배출하였으니 잘 못 될 이유도 없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조직이 우리 사회에서 첫발을 뗐다. 멋지게 다듬어서 세계의 문명국가에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치 번득이는 사무국이 고안하는 발랄한 사업을 보노라면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싶다.

  • 홍승기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