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정년을 묻고 답하다
2018. 8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로 종종 예술이 꼽히지만 그건 마치 프리랜서가 어쩌다 누리는 늦잠을 직장인이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정년 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 건 일면 자유롭게 느껴지지만 정년 보장도, 퇴직금도, 직장에서 꼬박꼬박 떼어가는 노후보장성 연금도 없다는 의미이다. 고용불안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다 몸이 아플 때도 유급휴가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그 예술의 본질을 포기하지 못하는 예술인들에게 ‘정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우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년을 어떻게 의미화하느냐에 따라 본질적으로는 없는 게 맞는 그것이 현실에서는 작동하는 상황을 예술인과 나눌 필요가 있었다. 무엇이 예술인을 더는 예술인이지 못하게 하는가. 그 주요 요인을 아는 일도 중요했다. 예술작업을 못 하게 될 때를 상상해보면서 지금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도 논의할 수 있길 바랐다. 설문에서 예술인에게 정년이 어디 있느냐 반문한 예술인도, 없는 것 같지만 비가시적인 기준이 있다고 답한 예술인도, 예술의 본질적인 힘을 제시한 예술인도 의미 있는 논의를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구독자 대상 온라인 설문에 324명 참여지난 7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구독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에 예술인 324명이 참여했다. 예상보다 많은 예술인이 적극적으로 답변한 덕분에 유의미한 기록과 의견을 얻었다. 응답자 324명 중 169명(52%)가 남성이었고, 여성은 150명(46%), 명시 안함이 5명(2%)이었다. 활동장르는 문학이 제일 많았고(78명, 24%), 미술(66명, 20%)과 음악(47명, 15%), 영화(37명, 11%)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문학 78명 | 사진 16명 |
미술 66명 | 기타 11명 |
음악 47명 | 국악 9명 |
영화 37명 | 무용 9명 |
연극 31명 | 건축 1명 |
만화 18명 | 연예 1명 |
첫 번째 질문 ‘예술인에게 정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에 예술인들은 비교적 다양한 답변을 선택했다. 결과는 ‘없다’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지만(47%), ‘(법적으로는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있다’는 답변과 ‘(조건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답변을 고른 예술인들이 각각 28%와 23%로 모두 정년이 현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경계로서 기능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인식에 동의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예술인에게 정년은 ‘없다’라고 답변한 이들도 건강상의 문제나, 예술적 한계, 더 이상 도전적이거나 새롭지 않은 인식 등을 이유로 스스로 정년을 결정하게 될 거라고 답변했다는 점이다.
없다 152명
(법적으로는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있다 92명
(조건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74명
모르겠다 (또는 생각해본 적 없다) 6명
이어서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선택한 이유를 주관식으로 묻는 설문에 예술인들은 단순한 답변 이상의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원대군(음악) 씨는 “죽기 직전까지 스튜디오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음반을 발매한 고 최세진 선생을 비롯하여 국내외 많은 예술인들이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일에 몰두한다”면서 “예술은 반복 숙달된 기술이라기보다 감정과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듣고 따라하며 배우는 말과 같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일부로 남고 후대에도 그 기록이 전수된다”라고 정년이 없다고 답변한 이유를 설명했다. ‘(법적으로는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있다’를 선택한 성지윤(음악) 씨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년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현실을 설명했다. 또한, “나이든 예술인까지 활동할 수 있는 제도가 거의 없고, 어쩔 수 없이 젊고 패기 있는 이들에게 밀려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서은(무용) 씨는 정년은 ‘(조건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서 “사회적으로 또는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정년은 없다. 본인의 예술적 가치와 수준에 따라 또 자기실현과 수요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생각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 창작활동은 나이와 무관하게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 삶의 경험에 따라 다른 형태의 예술을 보여줄 수 있다.
-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가능한 평생기술이라고 생각한다.
- 나이가 든다고 해서 창작활동의 욕구가 줄지는 않는다.
- 예술가의 정년은 주관적이기에 특정 나이로 객관화할 수 없다.
-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기획사 등에서 고용하지 않는다.
- 경제적 여건, 가족의 이해나 포옹 없이는 힘들다.
- 인건비 상승에 따라 어느 분야든 신규 유입 인력을 선호해 경력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 예술단 정년 보장으로 젊은 연주자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
- 나이를 먹으면서 몸이 쇠약해지고 작업 시간을 버틸 수 없는 시기가 온다.
- 건강상의 이유, 창의력 고갈, 무기력증 등 이유로 그만둘 때 그게 정년이 아닐까.
- 성공한 예술인은 정년 없이 오래 활동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정년을 맞기도 한다.
-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예술을 그만두게 되고, 그게 정년일 수 있다.
- 사람마다, 활동 장르마다 조건이 다르고,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자신만 아니까 스스로 정년을 선택할 수 있다.
- 의지와 상관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신체 또는 정신의 제한이 생기면 정년을 고려하게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응답에서 예술인이 활동하는 장르에 따라 답변의 차이가 드러났다.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장르와 고용 상태가 되어야만 작업이 가능한 장르는 고려해야 할 사항의 우선순위가 달랐다. 이들 중 대다수가 본인이 활동하는 장르에서 정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신체 기능 저하’(124명, 38%)를 꼽았다. 뒤이어 ‘경제적 어려움’(100명, 31%)과 ‘예술적 한계’(55명, 17%)를 선택했다. 기타 의견으로 “신체 기능에 우울증과 같은 정서적·심리적 상태를 포함할 수 있다”와 “요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가 있었다.
신체 기능 저하 124명
경제적 어려움 100명
예술적 한계 55명
나이 18명
없다 2명
“70세 정도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건강상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일 듯하다.”- djnoah(음악)
“정년이 없다고 답했고, 정년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천원짜리(만화)
“창작 활동하다가 죽는 날. 모든 예술가가 귀한 고뇌와 기쁨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가 맞는 마지막 날.”- 윤희선(서양화)
“문학에 한정하면 어떤 영감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아닐까. 그게 없다면 예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조형준(문학)
“대부분 활발한 씬은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나이 들어서도 왕성히 활동할 수 있는 경우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못할 나이가 되고, 그때까지 소수의 유명한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면, 예술로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 그 시점이 정년이 될 것이다.”- 오정수(음악)
“60세.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각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작가를 찾는 일거리가 줄어들어 쉽게 찾기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다.”- 오주영(문학)
“굳이 정년을 정한다면 30세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진입하면서 포기자들이 많이 발생한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들은 경제활동에 내몰려 생계 걱정을 해야 할 시기이고, 창작은 꿈과 이상향에 가까운 것으로 몰리게 된다.”- 최양선(미술)
“60세. 한참 제자들을 양성하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을 때 내려놓고 싶다.”- 김민정(음악)
“80세로 정하고 싶다. 100세 시대에 나머지 인생은 조금 다르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정현(미술)
“65세 이상이 노년으로 분류되니 그쯤이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동호(영화)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제정신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점. 88세쯤?!”- 이희정(미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할 때. 팀플레이가 중요한 업종인 만큼 팀원과 말이 통하지 않거나 의견조율에 어려움이 생기는 등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폐를 끼치고 있는 상태라는 판단이 들 때.”- 이인아(연예)
“50~70세. 본인 의사에 따라 원하는 때에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이면 좋겠다. 70세 이후로는 신체활동이 어려울 것 같다.”- 이현수(연극)
“100세. 100년이란 한 세기를 보낸 것이고, 한 예술인이 자기 영역을 개척하고 일궈온 것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와 무관하게 한 시대를 자신의 생각과 눈으로 바라보고 활동해온 것에 대한 구분이자 경계선으로서 상징적인 숫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대군(음악)
“예술인 본인이 결정한 때.”- 채승희(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