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앞당기는 요인들
2018. 8한국은 법적 정년까지 일하지 못하고 50대에 은퇴하는 비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반면 70대까지 질 낮은 노동을 하는 인구 비율 역시 가장 높은데, 결국 안정적인 일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늦게까지 일을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구조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통계는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른 현실(예술인 2명 중 1명은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이 있다)을 고려하면, 예술인과도 충분한 연관이 있다. 게다가 국민 다수가 노후 준비의 큰 부분을 공적 연금에 의지하고 있지만 예술인의 연금 가입률은 낮은 편이다.* 따라서 이처럼 노후 준비가 미비한 예술인이 안정적인 경제활동은 어렵고 살아갈 날은 계속 늘어나는 시대를 맞이하면, 젊은 나이의 빈곤을 80, 90대까지 이어갈 확률이 높아지는 안타까운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예술인의 정년을 스스로 예술 활동을 그만두는 시기라고 정의할 때, 그 시기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로 경제적 상황을 꼽을 수 있다. 예술인의 가난은 구조화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예술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정당한 법적 지위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설사 사회적 안전망이 있다 해도 예술인의 몫은 아니다. ‘예술인과 가난’을 으레 묶어 당연하다는 듯 인식해온 세태는 특히 젊은 예술인들을 상대로 착취구조를 구축했다. 일을 하지 않아서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밤샘하고 노력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관련 비용을 예술인이 부담하기까지 해야 하는 현실은 열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가던 예술인들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빼앗아갔다. 「예술인 복지법」 시행 이후 느리지만 주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가난을 강요받지는 않아도, 더 첨예하고 복잡해진 착취구조는 가난을 강제당하고 있다는 걸 의식할 새도 없이 예술인들을 기존 인식 틀 안에 밀어 넣는다. 저항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예술인들의 고민은 매일 이어진다.
한편, 많은 예술인들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그래서 정년은 따로 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설문조사에 응한 황진순(미술) 씨 역시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는 한 예술인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라며 의지를 표명했다. 달리 말하면 신체 기능 저하와 같은 건강상의 문제, 심리적 불안감 등이 예술 활동 지속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예술인들은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장르에 따라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이어가야 할 경우나 협업을 위한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어져야 할 경우 예술인 스스로 그 한계 연령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
특히 예술 활동이 곧 신체 활동으로 연결되는 장르에서는 신체 기능 저하가 예술 활동을 멈추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노화에 의한 기능 저하일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로 인한 기능 상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때 예술인이 기댈 수 있는 보험이나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 등을 사회는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년 지출이 가장 많은 항목이 의료비임을 고려하고, 심리·신체 건강을 잃으면 곧바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노년 예술인에게 더욱 세심한 정책이 필요하다.
나이와 역할에이지즘(ageism)은 1969년 노인의학 전문의인 로버트 버틀러가 노인에 대한 차별에 주목하고 만든 용어이다. 나이주의, 연령주의, 연령차별주의 또는 노인차별이라고도 번역한다. 나이와 노인, 노화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편견이 결합한 것으로, 노인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과 편견, 과도한 권한 부여와 소외 등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사회적으로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개인의 내면에서 부지불식간에 발생하기도 한다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대부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차별을 차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위험하다고, 나이가 있다고 만류하는 모든 일들. 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말 속에도 연령주의는 깔려 있다.
100세 시대에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노인 부양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하는 것도 노인 혐오와 연령주의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100세 시대 관련 정책을 제대로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며 특히, 노년 세대를 다른 세대와 동등하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100세 시대 시나리오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인도 예외일 수 없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기회, 전시와 공연을 열 기회, 지속해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이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주어져야만 예술인이 정년 없이 작업을 해나가기 용이할 것이다.
연령주의는 차별적 인식의 범위가 다른 차별보다 넓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세대 전반에 걸쳐 강화하고 있다. 어드만 팔모어 교수(미 듀크대 명예교수)는 유교 문화권 국가일수록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의 특권이 어느 날 배제의 불이익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면서, “노년세대가 ‘나이와 무관한(age-irrelevant)’ 동등성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 전반적인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물론, ‘나이와 무관한’ 동등성은 노년세대뿐 아니라 10대, 미성년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인식이다.
연령주의는 젠더 차별과 교차하기도 한다. 40대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극도로 한정되거나 더는 활동할 수 없게 되는 건 사회 전반에 깔린 연령주의와 젠더 차별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다. 배우 문소리 씨가 감독, 연기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는 한국의 40대 기혼여성 배우가 감당해야 할 차별적 현실을 적잖게 확인할 수 있다. 나이가 유독 여성에게 차별적인 잣대로 작용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성 중년과 여성 중년의 사회적 지위 역시 다르다.
예술계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권력 차이와 젠더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다. 누군가는 그 일로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누군가는 극단을 떠났다. 남아 있는 이들도 심리적 고통과 싸우고 있다. 그들이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으려면 더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젠더 차별 없이, 어떤 보복이나 2차 가해 없이 동등하게 작업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대한 남성 예술가 옆에 흔히 ‘뮤즈’나 여성 지지자, 보호자가 있었던 것처럼 기혼여성 예술인들의 경력 단절과 복귀 후 달라지는 위상을 적극적으로 보상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여성 예술인의 정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 긴 시간 여러 방면에서 요구했던 바이기도 하다. 현재의 노력과 함께 지속적인 변화와 실천이 있길 바란다.
이 밖에 반지성주의, 반예술주의가 팽배한 사회현상 또한 예술인이 작업에 회의를 느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예술을 소비는 하지만, 향유는 하지 않는 세태도 요소의 하나로 보탤 수 있을 듯하다. 앞서 살펴본 여러 요소들은 그동안 예술인 복지정책이 이르거나 뒤늦게 주목하고 집중하는 부분이다. 많은 예술인이 ‘할 수 있는 한, 평생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소망으로 꼽는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 지속적으로 예술가 편에서 응원하는 것. 예술인 복지의 본질과 지향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