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자리
2017. 12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부분
너무나 유명한 시구입니다. 며칠 전 우연히 이 시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구가 적혀 있는 장소였습니다. 바로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테이블이었죠. 그리고 그 아래에는 쓰레기는 휴지통에 넣어달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죠. 당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폐허로 만들지 말아 달라는 이 간곡한 부탁! 간이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 시구를 보며 실소했습니다.
이처럼 실상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시를 접합니다. 지하철 승강장마다 붙어 있는 시부터 SNS상에서 아이돌들의 사진이나 소위 ‘움짤’ 아래, 맥락을 삭제한 채로 붙어 있는 시구들까지 말이죠. 이 시대에도 시는 어떤 식으로든 ‘소비’되고 있습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 한 편의 시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의미와 이미지들, 그리고 그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투여한 시인의 노동(이것은 분명 ‘노동’입니다)을 무시한 채 무분별하게 ‘소비’되고 있기는 하지만요.
때문에 이와 같은 형태로 시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우려 또한 존재합니다. 하지만 ‘소비’의 방향성은, 그것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의 주체가 스스로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당연한 법칙입니다. 어떻게 소비되든 간에, 그 소비됨에 생산자는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죠. 생산자로서 시인 혹 예술가는 소비 주체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하고, 이것은 자본주의 시대 속 예술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대의 예술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구조화되며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소비에 따라야만 하는 적당한 이윤이 생산자에게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시의 경우 SNS상에 떠도는 모든 시구들에 해당 시인이 일일이 대응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아이돌 사진 밑에 붙은 시구는, 시 그 자체로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이 부여하는 판타지의 소비를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시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소비’가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전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는 셈입니다. 결국 또다시 문제는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 속 예술입니다. 그리고 이 양자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위기를 감지합니다.
‘시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등 우리는 어느 사이 수많은 ‘위기’론들 속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제 위기가 아닌 것은 없는 지경입니다. 하긴 예술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 교육의 위기, 한국 축구의 위기 등 우리는 수많은 위기를 겪어왔고, 겪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위기가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그리고 당연히 이 위기론들 속에 기생하며, 이 위기를 즐기며, 이 위기로 인하여 매우 자본주의적으로 먹고사는 수많은 호사가의 입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우리’가 수많은 위기를 ‘자본주의적’으로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들이 말하는 원인의 대부분은 그 ‘성과’가 미비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과연 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말하는 성과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왕왕 위기를 말할 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이 실용의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겨져 향유되고 있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은 역사에 이름은커녕 그 존재조차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대중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권력층이 향유하던 것들이 대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그 권력의 힘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까지 보존된 것이죠. 실상 그 예술작품의 생산자들 또한 당대 엘리트들이었고, 결국 예술은 지배계층의 정신적 소비재, 혹은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예술은 점점 지상으로, 지상의 수많은 이들에게로 몸을 낮춰 내려오게 된 셈이죠(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의 확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몸을 낮추는 것. 이를 통하여 예술은 지상에 있는 이들의 신음을 듣게 되었고, 그 소리들을 자신의 몸속에 새겨 넣거나 자신의 몸을 바꾸게 됩니다. 예술이 노동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 노동에 대한 합당한 가치를 바라는, 매우 정당해 보이는 이 요구가 지금 이 자본주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술을 소비하는 대부분의 소비 주체들은, 이제 권력 집단이 아니라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현시대의 대중은, 시장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향유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대중문화이고, 그것이 만들어낸 희로애락의 독재입니다. 한 시대의 문화라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 시대의 마음의 총합은 대개 어떤 형태의 독재로 생성됩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의 독재는, 결국 시장의 원칙일진데, 예술을 ‘소비’하는 형태가 전혀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대개의 위기론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이제 예술은 자본주의가 만든 시스템의 바깥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때론 예술은 패착을 두기도 합니다. 그 예로 자기 스스로를 종교화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시장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일종의 자괴감은 그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만들어냅니다. 바로 이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에 종교적 성스러움을 부여하는 것이죠. 그 스스로를 마치 순교자로 만들어 편협과 아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채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
자본주의와 예술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습게도 예술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완전하게 복속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핸드메이드와 레디메이드처럼, 예술의 속도는 시장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몸을 낮추었기에 권력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생산방식이 대개 전근대적이기에 21세기의 생산속도에 못 미칩니다. 때문에 위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완전히 복속된 예술은 그저 식물처럼 생장(生長)만 할 뿐, 성장(成長)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생장과 성장. 소비 주체들의 소비와 예술노동에 따라야 하는 대가는 같은 맥락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인데, 어쩌면 대개의 예술가들 또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소비와 대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생장과 성장을 잘 구분하지 못하듯 말이죠.
너무나 도덕적인 이야기이지만, 실용과 소비로부터 자유로운 자리가 지금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가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슬픈 폐허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자리에 함께 앉아볼 것이고, 누군가는 동승하여 위기뿐인 이 먼 여행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닌 타자들과의 감성적 연대이고, 이것이 예술의 진정한 소비일 것입니다.
-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가 있다. 제5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