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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0

202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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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만화가

예술인들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제 만화책 『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책에는 만화가 지망생이던 저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은 친구 둘이서 작업실을 찾아 이사를 하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저희는 책상만 놓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그림만 그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는 지하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그곳은 건물주가 재건축을 위해 건물을 허물기 전까지 돈을 벌고자 내놓은 허름한 목욕탕이었습니다. 심지어 난방도 끊긴 곳이었어요. 그곳을 시작으로 저희는 10여 년 동안 무려 10번 이상의 이사를 하게 됩니다. 나중엔 집을 찾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버는 건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를 다니는 건지 저희도 헷갈릴 지경이었어요. 역마살이 있거나 여유가 있어서 이사를 다닌 건 아닙니다. 1년 이상을 살게 두는 집들이 많지 않았어요. 내쫒기다시피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건 단지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애써 얻은 아르바이트나 그림을 써준다는 곳이나 그 어디에도 우리에게 안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만화 『자리』 중에서.

요즘에는 표준계약서 양식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출판표준계약서’만 검색해도 쉽게 데이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작은 컷의 그림 한 장, 소규모 책자에 쓰이는 일회성 그림은 나에게만 소중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만들고 싶다면 꼭 표준계약서 양식을 검토하시라고 말씀 드립니다. 저작권과 출판권, 데이터 전송권 등등 자신의 권리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작은 컷, 그림 한 장이라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쓰일지 검토하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자리가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자리를 찾아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안전한 집을 얻지 못하는 동시에 그림이 쓰일 자리도 얻지 못하면서 불안과 스트레스는 커졌고, 결국 몸으로 반응이 왔습니다. 친구와 저는 둘 다 완치를 알 수 없는 면역질환에 걸렸습니다. 친구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저는 길을 가다 갑자기 걸을 수가 없어 통증이 지나갈 때까지 길가에 서 있곤 했습니다. 10~20분쯤 통증이 왔다 사라지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지곤 했고, 그럴 때면 당시에 읽고 있던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즈』의 한 대목을 떠올렸습니다.

만화 『자리』 중에서.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는 날엔 너도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하곤 해. 통증 때문에 괴로운 건 아닐까, 외롭진 않을지, 넌 어린 시절, 가장 어둡던 날들 속에서 나를 끌어내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축복받은 신비를 일깨워줬어.’

친구, 동료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들입니다. 비대면의 돌림병 시대에도 우리는 화면으로라도 사람들과 소통하려 합니다. 뜻을 같이 하여 함께 걸어가는 지금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습니다. 내 자리가 우리의 자리로, 너의 자리가 나에게 길을 내어주기도 하는 과정이 예술작품에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예술활동증명이라는 제도를 몇 해 전에 알고 등록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다른 친구에게 권유를 했습니다만, 친구에게는 최근 2년 이내 증명해야 할 활동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최근 2년 이내엔 활동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준비하는 사람의 과정은 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고민해본 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힘을 합쳐 그 친구가 전시를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친구는 예술활동증명을 받았고 다른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재단에서 경력 2년 미만 신진 예술인들도 활동증명을 받을 수 있게 한다고 들었는데, 나아가 습작 포트폴리오나 기획서 같은 준비 과정도 예술인들의 활동영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같이 청춘을 넘어 이제 중년을 맞은 『자리』의 주인공 ‘순이’, 고정순 작가가 얼마 전 낸 두 번째 산문집 『그림책이라는 산』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꿈을 지지해줄 무릎의 힘을 기르는 일과 시시한 나를 견디는 것’ ‘작가의 생을 이루는 4원소가 있으니 밥, 술, 부업 그리고 영혼의 협잡꾼. 이게 가까운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라서 다 갖추기 어렵다는 큰 단점이 있다.’

여러분도 무릎으로 버티며 각자의 시시함을 견뎌 꿈을 지지해줄 4원소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