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 시인 고군분투기
2018. 6억울하지는 않다. 시인의 삶에 억울함을 가진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십대 시절엔 세상 사는 일에 막무가내였다. 삶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시가 너무 좋았으니까. 시인만 될 수 있다면 거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시만 쓰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몇 번이던가. 지금 나는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억울하지는 않다.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애초에 시인은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없는 부류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시인은 가난하지만 지고한 뜻을 가진 자들이기에 물질을 바라거나 탐해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윤리의식을 가진 적도 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굶는 연습과 혼자 사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다소 망측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시에 목숨 건다”는 말이 있다. 습작 시절에 매일같이 하고 듣던 말이다. 등단 이후에 늘 하던 말이기도 하다. 시에 목숨 건다는 말의 이면에는 시를 목숨처럼 생각하고 잘 쓰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더 현실적인 의미는 미래의 가난함을 견딜 수 있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대학의 국문과나 문창과에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한 교실에 1명이 나올까말까 한다. 이들은 모두 한때 시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졸업반이 될 즈음이면 불투명한 미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시인으로 사는 것은 시를 잘 쓰느냐 아니냐보다 그 무게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문학 청춘의 결기 어린 다짐도 세월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생활인으로도 살아야 하는 시인이 되면서 생각은 점차 변한다. 시인도 먹고살아야 하고, 시인도 결혼을 해야 하고, 시인도 집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궁색하지 않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가 생활인을 자처하는 시인들의 의식 저변에 자리 잡는다.
나는 시인으로서는 아주 용감하고 무모한 축에 속한다. 집도 없이 결혼을 했다. 이쯤에서 만족해야 했는데 첫째 딸을 낳았고, 둘째 아들을 낳았다. 시인사회에서는 다산에 속한다. 대책은 없었다. 결혼했으면 당연히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가족관을 탓하기에는 내가 너무 무책임했던 것일까. 너무나도 어여쁜 아이들을 보는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 대신 생활인으로서 치러야 하는 고단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내가 가진 여러 직업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 고단함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의 첫 번째 직업은 시인이다. 시인들은 모두 시인이 생업을 지탱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직업군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업이다. 시를 써서 먹고 살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더라도 시인들은 대부분 시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첫 번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직업은 강사이다. 대학에서 시간당 보수를 받는 시간강사를 하고 있다. 일명 보따리 장사라고 부른다. 이 보따리 장사 자리를 얻기 위해 대학원에서 10년 동안 학생 신분으로 살았다. 학령인구가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대학도 위기라 강사 자리 얻기가 쉽지 않다. 시간 강사 공채 모집 공고를 눈여겨보기도 한다. 울릉도에서 강의를 요청해도 달려간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그러면 왜 교수가 되지 않느냐고? 그 이유를 수십 가지 이상 댈 수 있지만 나의 자존과 궁색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참기로 한다.
세 번째, 나는 출판사 비상근 편집자이다.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시 전문지 주간을 맡아 일주일에 한 번씩 출근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출판사 비상근 편집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자리이다.
네 번째, 나는 집필가다. 콘셉트만 주어지면 세상의 모든 글을 쓸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받는다. 물론 아르바이트이다. 교정 교열, 윤문, 자유기고, 때론 카피를 쓰기도 한다. 요즘은 모 은행의 사보에 책 리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했던 집필 아르바이트만 모조리 써도 A4 용지 몇 장을 넘길 것이다. 다섯 번째, 나는 살림과 육아를 한다. 아내가 외출하거나 아르바이트를 나가면 전적으로 아이들을 내가 돌본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있으면 자유롭게 만화영화를 볼 수 있고,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으니까.
데뷔 이십 년 차 시인이며 4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내 생활은 이렇다. 그러면 여행은 언제 가고 시는 언제 쓰냐고?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모두 비정규직이며 일당벌이 일이다. 하는 일은 많지만 의외로 노는 시간도 많다. 여행도 자주 가고, 시도 열심히 쓴다. 가장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은 아내이다. 시인을 남편으로 둔 아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아내도 육아를 책임지며 일주일에 두 번 일을 나가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렇게 고군분투를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한 달에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고정적으로 적지 않다. 그러면 다른 시인들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의 생업 분투기도 내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십 년 차 시인으로 시인들의 생활 언저리를 자주 기웃거린 바 있어 대체로 상세히 알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자영업이다. 원천징수 3.3%를 제하고 원고료를 받는다.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조사한 ‘한국의 직업조사’에서 가장 연봉이 낮은 직업 순위 1위가 시인이었다. 1년 평균 연봉이 542만 원, 한 달 평균 수입이 45만 원이었다. 크게 놀랄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만 써서 먹고사는 시인들은 적기 때문에. 시인들에게 먹고사는 방편으로서 최고의 직업군은 공무원이나 교사, 교수, 대기업 사원 등과 같은 정규직이다. 하지만 이런 직업을 가진 시인들은 극히 부러운 소수이므로 열외로 놓자. 시인들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늘 밀릴 수밖에 없다. 시를 쓰며 영어와 취업 준비를 모두 할 수 있을까. 매일 시만 써도 좋은 시를 써내기 힘들다. 시인들은 경쟁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하는 또 다른 직업도 다양하다. 대학원 조교, 도서관 강의, 출판사, 각종 시 창작 강의, 학원 강사, 각종 집필 알바 등등. 이처럼 시와는 무관한 일에 큰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런 일들에 치여 시를 못 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현재로서는 모두 시인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시는 한 국가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 문화적 자산을 창출해내는 시인들의 삶은 극도로 열악하다. 시인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허황된 신념이 시인들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수년마다 한 번씩 로또에 당첨되듯 찾아오는 각종 지원금은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다. 그나마 예술인복지재단과 같은 곳은 고단한 생활 속에서 만나는 단비와도 같다.
시인들의 재능을 시민들과 공유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시를 읽고 나눌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한 동네 한 시인 만나기’와 같은 기획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기업체마다 시인들을 후원하면서 사원들과 정기적으로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 시를 읽는 동네, 시를 읽는 회사, 시를 읽는 나라는 그 무슨 의미에서든지 지금보다는 백배 천배 더 나을 것이다. 그냥 받는 지원금이 아니라 시인으로 재능을 나누며,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 그러한 기회를 통해 시인들도 문학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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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가 있고,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