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길 아름답게
2018. 1비록 언어와 표현은 다르지만 해가 바뀌는 시점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해 첫인사로 서로의 행복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행복이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가치임을 추측하긴 어렵지 않다. 또한, 행복의 가장 보편적인 정의로 ‘주관적 안녕감’이 회자되는 걸 보면 평안하고 안녕한 웰빙(Well Being)의 상태를 보편적 행복의 상태라 해도 무방하겠다. 동양에선 5복, 즉 인생사 다섯 가지 부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상태를 복이라 하고, 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웰빙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또는 허약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2018년 새해를 맞아 어느덧 19년째 접어든 나의 유럽 생활을 돌아보며 나는 과연 웰빙한지, 수많은 해외 음악인들의 삶은 안녕한지 돌아보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웰빙의 조건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양호한 상태라면 대다수 재외 음악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것은 사회적 조건의 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내 가정과 내 나라, 즉 나를 보호하는 사회라는 울타리의 부재는 가장 먼저 해외 음악인들의 신체적 건강을 위협한다. 혼자 살아갈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20대 초중반의 나이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부모를 떠나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유학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다. 청소, 빨래 등의 집안일은 물론이요, 삼시 세끼 또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매번 외식할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도 못하거니와, 있다고 해도 한인사회가 발달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따뜻한 한국 음식 한 그릇 사 먹을 곳도 없다. 아침은 거르기 일쑤고, 점심은 패스트푸드나 학교식당에서 기름진 현지음식으로 때우고, 짧은 언어 실력으로 알아듣기 힘든 수업과 연습에 씨름하다가 탈진상태로 집에 돌아오면 라면이나 간식으로 대강 배를 채우거나 빈속으로 잠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다 한식을 먹을 기회에 폭식으로 이어지고 유학생 대부분은 유학 생활 1년 안에 위염, 만성소화 불량, 역류성 식도염 등을 얻는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질병이다. 인간관계나 업무상 스트레스 등 한국사회가 주는 스트레스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해외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는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타국 땅에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치 유아기로 회귀한 듯한 불능 상태를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경험하게 된다. 은행거래, 집 구하기, 학교 수업, 오디션 등 한국에서는 내 언어로 막힘없이 편안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들도 이곳에선 극도의 긴장을 동반한 모험이자 반드시 스스로 수행해야 할 미션들로 바뀌게 된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 같지만 그도 완전히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이나 성격, 언어능력에 따라 부분적·제한적으로 해결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불능 상태 중에 일련의 크고 작은 부조리나 차별을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혼자서 감내해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나의 존재가 환대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부당함과 부조리함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깨닫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 예술과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타국 생활의 목적의식이 충만할 때는 내 가정과 내 나라라는 울타리의 부재를 웃으며 간과할 수 있지만 질병, 빈곤, 인간관계 갈등 등 어려움이 나를 막아섰을 때, 예술이라는 거대한 철옹성이 나의 비루한 재능을 내려다보며 나의 열망과 목적의식을 비웃을 때,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근본적 회의에 휩싸이며, 정체성의 혼란 속에 정신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위대한 예술에 대한 숭고한 열정으로 나를 지켜왔다 할지라도 순간을 노래하고 표현하는 시간예술인 음악을 다루는 연주자들은 일반인들은 경험할 수 없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아무리 철저한 연습과 준비를 했다 할지라도 무대에 서 있는 그 시간만이 결과물로 드러나기 때문에 한 번의 실수나 가벼운 감기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이방인과 음악인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해외 음악인들은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질병에 노출된다.
이러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무기력증, 중독, 나아가 우울증과 같은 절대 가볍지 않은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족, 지인과 어울려 산다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제되거나 제재가 가해질 가벼운 집착 증상들도 함께 살면서 간섭해주는 이가 없이 홀로 방치되면서 통제 불가능한 중독으로 번지기도 한다. 지속되는 불능과 한계 속에서 무기력에 빠져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공황장애, 게임중독, 도박중독은 물론 마약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던 피아니스트가 졸업연주 시험 전날 극심한 스트레스로 조현병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와 결국 암으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불안정한 마음이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살피고 조절해줄 수 있는 주변과 사회의 울타리가 있었다면 비극적인 사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 안타까움은 오래 남는다. 물론 정기 검진이나 정신과 상담이 외국에서도 가능하지만, 타국에서의 특수하고 복잡한 상황과 그 속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구체적으로 표현 및 전달하고 또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음식 하나, 광고 하나에도 따라붙는 흔한 수식어, ‘웰빙’이 정작 우리 삶에선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질, 나아가 나의 존재를 결정짓는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거나 간과할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도, 찬란한 예술도 내가 건강히 존재할 때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해외 음악인들을 비롯한 예술인들은 가정이나 국가라는 사회적 보호막이 약한 특수한 자신의 상황을 빨리 자각, 수용하고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지친 정신과 병든 육체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규칙적이고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으로 나의 몸을 관리하면서 나의 정신과 영혼은 건강한지 수시로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정신에 힘과 마음의 치유를 주는 독서와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집중할 수 있는 건강한 취미를 찾는 것도 치유의 좋은 방법이다. 나는 복식 호흡과 함께 기도와 묵상을 하며 영혼과 마음에 평안을 얻고, 가벼운 트레킹과 텃밭 가꾸기를 통해 삶의 여유를 찾는다.
또한, 한국인과 현지인을 친구, 동료로 균형 있게 만나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나 스스로 새로운 사회적 울타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지인과만 친구가 되면 자칫 정체성을 잃기 쉽고, 한국인과만 소통하게 되면 몸은 이곳에 살지만 마음은 이 땅에 살지 않는, 나만의 ‘한국’이라는 허상의 섬에 갇히기 쉽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1년에 한 번, 최소한 2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재외 한국인도 입국과 동시에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의 보험료만 부담하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만 40세부터 2년마다 시행되는 정기검진과 함께 필요하다면 정신과 상담을 통해 나의 상태를 점검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정기적인 점검은 외국 생활 중 혹시 중병에 걸리진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돌아가서 어떻게 건강을 관리할 것인지 방향도 제시해준다. 또 외국에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내 나라를 여행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하며 내 안의 사회적 결핍들을 채워 나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도 한국 음악인들은 유럽과 세계 무대를 누비며 활약하고 있고, 또 그 뒤를 이을 수많은 클래식 학도들이 세계로 향하고 있다. 2018년 새해, 해외에서 활동 중인 음악인들과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이어져 꽃 피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그대로 안녕하기를 염원해본다. 해피 뉴 이어!
-
2008 오스트리아 Kunst Uni. Graz Master Konzertgesang, Master Gesang
현재 스위스 베른 거주
Vokal Ensemble BeCant 단원
콘서트 솔리스트로 활동
2004 독일 Essen Folkwang Hochschule Musik Theater Dipl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