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구독 신청
닫기
구독신청
메뉴바
vol.20 2017. 11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미술가 이미래

스마트폰, 미술관, 노스탤지아

2017. 11
스마트폰 미술관 노스탤지아

어느 저녁, 서너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근에 공통으로 본 전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 친구는 특정 전시를 지칭하며, 차라리 수능 시험을 볼 때처럼 전시장 입구에서 스마트폰을 걷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작품을 둘러싸고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데에 골몰한 나머지 작업의 본질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관은 여행지나 레스토랑 못지않게 사진촬영 장소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대형 미술관에서 “○○ 전시 보고 인스타 인생샷 찍자!” 같은 문구로 전시를 홍보하는 일도 흔하다.

그 저녁 대화에서 화두가 된 작품은 소위 ‘1분 조각’으로 불리는 독일 작가 어윈 웜(Erwin Wurm)의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였다. 작품은 간단하고 재치 있는데, 전시장에 마련된 오브제(보통 의자나 나무 작대기, 핸드백 따위의 소품들)를 활용해 작가의 지시문을 따라 하면서 관객의 몸이 직접 조각이 된다는 내용이다. 가령, 탱탱볼 두 개를 이마와 전시장 벽 사이에 두고, 적당한 압력으로 스스로의 머리통과 탱탱볼 두 개의 평행 상태를 1분간 유지하는 식이다. 언뜻 무대처럼 보이기도 하는 지정된 자리 위에서 관객은 1분간 스스로의 몸을 볼거리로 내어주며 고행을 자처하게 된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그 질감이 영영 바뀌어버린 경험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해서 심지어 식사 시간의 밀도마저 그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런데 어윈의 ‘1분 조각’은 ‘정지한 신체’를 중심으로 유독 재미있는 중첩을 만들어낸다. ‘1분 조각’은 흥미를 유발하는 모습이 쉽게 연출된다는 특성 때문에 전시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으레 셔터 세례를 받곤 하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관광지의 랜드마크 앞에서, 혹은 금방 자세를 바꾸어버릴 고양이나 새 따위의 동물들 옆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다. 일단 사진을 찍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거나 고양이가 달아나버린다는 이유 등등 때문에 고정시켰던 자세를 셔터 소리에 맞춰 재빨리 해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분 조각’에서 관객이 충족시켜야 할 얼마 안 되는 조건들 중 하나는 그나마 1분이라는 시간 단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류에게 스마트폰 카메라의 셔터 소리는 마치 ‘포즈를 해제하시오’라는 명령어와도 같아서, ‘1분 조각’을 1분 동안 수행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게 되었다.

카메라가 내장된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이전의 ‘1분 조각’에서, 참여 관객의 ‘볼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몸’은 일상적 맥락을 벗어난 무엇이었다. 관객들은 아무런 목적이나 효용 없이 1분이라는 체벌의 시간을 견디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용되’고 ‘보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객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1분 조각’을 소비한다. 그들은 ‘1분 조각’에 참여하면서 조각이 되는 체험을 할 뿐 아니라 동시에 피사체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지한 몸에는 목적성이 부여된다. ‘사진에 찍히기 위함’이라는 뚜렷한 당위를 가진 몸은 더 이상 비목적적일 수 없으며, 더욱이 2017년의 시점에서 비일상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무엇이 되어버렸다. 일상 사진의 아카이빙, 공유, 배급 등이 숨을 쉬는 일 만큼이나 손쉽고 흔하게 된 지금, 관객들의 몸은 ‘1분 조각’이 그들에게 볼거리가 되고, 전시되어보기를 요청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전시화가 일상화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미술 경험 공유가 인스타그램 등의 매체를 통해 활발해지고 빨라지면서 주변 미술인 중에는 여러 사람이 공유한 사진으로 전시 방문을 대체하는 이들도 꽤 늘었다. 흥미롭게도 다른 문화 경험에 비해 미술 전시의 경우 SNS를 매개한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을 대체하기에 더욱 유연한 측면이 있다. 다른 문화생활의 경우 ‘인증 사진’에는 문화적인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상징적 대리물이 피사체(영화 포스터와 영화표, 팝콘, 공연장, 연극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 등)가 되는 반면, 미술 경험의 경우 작품의 몸 자체가 관객의 몸과 더불어 사진 속에 담긴다. 많은 사람들이 업로드한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작품을 보는 일은, 멀티미디어가 아닌 조각이나 페인팅의 경우 작품을 직접 본 것만 같은 환영을 더 잘 제공한다. 업로드된 사진이 ‘인증샷’이든 ‘기념사진’이든, 미술 작품이 수많은 사람들의 SNS 계정에 담겨 공유 및 배포되는 현상은 반갑고 고무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현대인(들)’이라는 이미지는 긍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어윈 웜의 작업에서처럼 ‘미술관’이라는 그림 자체를 해치는 심미적 불청객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슷한 각도에서 그들은 영화적 스크린으로부터도 추방되었다. 숨을 쉬고 끼니를 챙겨 먹듯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 그 자체임에도, 영화를 만들 때 이에 대한 현실적 고증을 하는 것은 심미적인 차원에서 아무도 내켜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묘사나 고증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나와 내 친구들이 ‘1분 조각’이 전시되어 있던 장소 한가운데에서 느꼈던 석연찮음이 영화 속에서만큼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인간들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도 겹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 작은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는 각자의 마음을 모두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나는 미술관이나 극장에서까지 굳이 내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초상이 대표하는 모든 감각들에 대한 막연한 반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빠르고, 가볍고, 휘발성이 있으며 쉽게 잊히는 것.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버릴 수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인 무엇. 그런 것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퍼포먼스를 만드는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도 훨씬 전에 일체의 작품 촬영 및 이미지 공유를 거부한 바 있다. 그래서 그의 무수한 작업들은 구전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나는 2년 전 그의 작업을 처음으로 직접 보았다. 작품은 대개 미술관 안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설계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데, 내가 본 작품은 미술관 직원이 갑자기 스트리핑을 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작품들 사이를 걷다가 문득 도슨트 복장을 하고 있던 키가 큰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나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가오더니 느리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이어 관객들이 하나둘 모였고 퍼포먼스는 짧은 듯 길게 지속되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여자는 짧게 작품 제목을 말하더니 옷을 주워 입고는 사라져버렸다.

작업을 본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따금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내가 경험의 꼬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혹은 그 꼬리가 이렇게 길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느 쪽이든 그것은 경험 자체를 넘어서 경험을 독점했다는 감각에 대한 쾌와 관련이 있다.

다시 ‘1분 조각’ 이야기로 돌아와서, 언쟁은 사실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아무리 작품의 제목이 ‘1분 조각’일지언정, 1분을 버티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1분 조각’ 시리즈가 등장하기 전 어윈 웜의 전작에 대해 언급했다. 작가가 펜, 풀, 도장, 메모지 따위의 문구류를 직접 눈, 코, 입, 귀 등 얼굴의 모든 구멍들에 쑤셔 넣고 짧은 시간을 버티는 동안 촬영된 사진 한 장이었다. 또 다른 친구는 작업의 본질은 그 전작이 미술관이라는 무대로 옮겨가 ‘1분 조각’ 시리즈가 되기 이전, 이미 그 사진 한 장 내에서 모두 실현되었노라고 이야기했다. 스마트폰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미술관’으로 옮겨가 ‘참여 미술’의 형태를 띠게 된 시점부터 본질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쯤에서 모두는 본질이라는 실체 없는 형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표류하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어느덧 ‘휘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를, 어쩌면 그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미래(미술가)
  • 이미래(미술가)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입체 매체를 위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개인전 ‘낭만쟁취(인사미술공간, 2014)’ 외 ‘네리리키르르 하라라(서울시립미술관, 2016)’, ‘복행술(케이크갤러리, 2016)’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