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 시대
2017. 10흔히 오페라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처음은 ‘가수의 시대’이다. 아직 녹음기술이 발달하기 전, 오페라극장을 찾아야만 오페라를 듣고 볼 수 있었던 이 시기에 사람들은 가수의 수준 높은 기교와 놀라운 가창력을 갈구했다. 벨칸토(Bel Canto: 아름다운 노래를 뜻한다) 오페라를 주 무기로 최고의 성악가들이 아름다운 목소리와 완벽한 테크닉으로 오페라에서 빛을 발하며 현재 대중가수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 이 시기의 오페라는 성악가의 기교와 고음, 미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발성에 방해가 없도록 연출과 성악가의 움직임을 최소화했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성악가가 아름다운 목소리와 긴 호흡을 마음껏 뽐낼 수 있도록 템포를 늘였다 줄이기를 반복하기도 했으며, 고음을 무제한 끌 수 있도록 한없이 기다려 주었다. 이 시대의 오페라는 예술보다는 기예에 가까웠다.
다음으로 오페라는 ‘지휘자의 시대’를 맞이한다. 성악가의 시대를 지나며 쏟아져 나온 완벽한 테크닉과 음악성을 두루 갖춘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한 수많은 오페라의 대가들이 위대한 마에스트로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내며 오페라를 음악적으로 완벽하게 완성시킨다. 토스카니니를 필두로 카라얀과 번스타인 등 천재적 지휘자들은 발달한 녹음기술을 기반으로 명반들을 쉴 새 없이 찍어내며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안방에서도 최고 수준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로 인해 서양문화권에 갇혀 있던 클래식이 날개를 달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대 오페라의 모든 포커스는 음악 자체에 맞춰져 있었다. 음악 해석의 절대적 주도권을 쥔 지휘자들은 작곡가의 의도에 맞는 최고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악보를 깊이 연구하고 그들만의 해석을 더하면서 성악가에게 전에 없던 많은 요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성악가도 개인 콘서트장이 아닌 오페라 무대 위에서는 자신의 소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에 집중하여 자신이 가진 테크닉과 예술성이 집약된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보여야 했다. 세계 3대 테너 중 하나인 호세 카레라스가 젊은 시절 연습 도중 지휘자 번스타인에게 계속해서 모욕에 가까운 지적을 받는 동영상을 보면 이 시대 지휘자의 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비디오의 시대 즉, 보는 음악의 시대를 맞으며 오페라는 ‘연출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사운드보다는 시각적 효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며 오페라에서 연출가들이 주도권을 잡는다. 같은 줄거리와 음악이 식상하다 느낀 연출가들은 오페라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오페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페라의 배경을 과거가 아닌 현대로 바꾸는 시도부터 오페라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환경보호, 동성애, 난민문제 해결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과도한 노출, 음란, 마약과 같은 퇴폐적이고 자극적 소재들로 흥미와 볼거리들을 채우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무대 위의 퍼포머, 성악가들이 혹사를 당하고 있다. 연출가의 완벽한 꼭두각시가 된 무대 위 성악가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연출자의 요구대로 연기와 자세, 동선을 모두 소화하는 동시에 노래 또한 완벽히 불러내야 한다. 노래만으로도 완주 후 탈진 상태가 되는 벨칸토 오페라 속 주역 소프라노는 3시간 반 내내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해가며 3옥타브를 넘나드는 아리아를 불러야 한다. 누운 자세로 아크로바틱을 하듯 의자에 엉덩이만 걸친 바리톤 가수는 아리아 한 곡을 그 자세로 완창해야 한다.
내가 독일 에센음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이웃 도시 도르트문트 오페라극장에서 차이콥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을 새로 올린 적이 있다. 오네긴을 보고 첫눈에 반한 여주인공 타티아나가 자기 방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일명 ‘편지 아리아’를 부르는 내내 소프라노는 전라 상태로 노래했다. 이 연출에 객석에서 10분간 야유가 쏟아졌다. 이 소프라노의 나체 사진이 신문 한 면을 장식한 오페라 평론에서 비평가는 “소프라노가 아리아를 부르는 10분은 내게 악몽과도 같았다. 아름다운 음악은 사라지고, 대신 낯 뜨거움과 무안함만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이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출인가?”라고 혹평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계약직인 연출가는 첫 공연 후 도르트문트를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극장이 새롭게 준비해 무대에 올린 이 오페라는 그 시즌에만 최소 5번 이상, 그다음 시즌에도 계속 공연될 예정이었다. 맹비난뿐인 노출을 계속하며 주역 여가수가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고 시즌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비디오 시대를 사는 성악가에게 정형화된 미의 기준에 맞는 외모는 필수 조건이다. 오페라극장으로 가는 유일한 관문인 에이전트 오디션 신청서에는 반드시 자신의 몸무게와 키, 옷 사이즈를 기입해야 한다. 이전에는 외모가 부가적 조건이었다면 요즘은 실력이 좋아도 외모가 기준미달이면 에이전시를 찾기 힘들다. 특히 여성, 그중 수가 많은 소프라노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성악가가 극장과 공정한 계약서를 쓰도록 법적 절차를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에이전트 대부분이 실제 무대에 섰던 성악가나 클래식 분야의 종사자가 아니라 법이나 경제 전공자들이기 때문에 가창력을 분별하는 귀나 오페라에 대한 전문적 이해도가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외모와 상품성이한 조건을 갖춘 성악가를 선호하게 되고, 이런 에이전트들이 제공하는 가수들 위주로 오디션을 보게 되는 오페라극장은 왜 예전 같은 실력의 가수가 없냐고 한탄한다. 하지만 정작 뛰어난 실력을 갖춘 상당수 성악가들은 오디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 오페라 공연의 음악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과거 대가들의 예술성을 경험하고 듣는 귀가 까다로워질 대로 까다로워진 청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연출의 시대, 시각적 자극이 더 중요해진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다른 예술 장르도 상황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을 잃고, 잊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그걸 원한다는 듯이. 하지만 정말 그런가? 객석에 앉아 큰 키에 배우 이상의 외모를 자랑하는 테너가 귀에 익은 아리아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에도, 찬란히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햇빛처럼 반짝이는 소리로 같은 아리아를 부르던 파바로티를 사람들은 그리워한다. 집으로 돌아와 수백 번 들은 그의 녹음을 다시 들으며 감탄하다가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를 더는 무대에서 들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깊이 탄식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외모는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워지는 대상이지, 평가와 시장성의 잣대일 수 없다.
사람들이 오페라극장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전이 품고 있는 퇴색하지 않는 절대적 아름다움, 음악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스피커나 기계 조작으로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닌 오직 인간의 몸과 발성 기관을 통해서 나오는 최고의 소리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스토리와 하나가 되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극락의 카타르시스를 또 한 번 느끼기 위해서이다.
오페라는 음악극이고 음악은 청각적 아름다움을 본질적으로 지향한다. 특히 오페라가 가진 차별성과 경쟁력은 오랜 연습과 수련 끝에 얻어진 최고의 가창력과 예술성이 아니고서는 완벽히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온갖 볼거리로 무장한 단발성의 ‘보는 음악’을 어설프게 흉내 내며 정작 영속되는 고전적 가치의 원천인 ‘소리’라는 본질을 놓친다면 이미 마니아 음악으로 치부되고 있는 오페라는 차별성을 잃고 머지않아 과거의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본질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며 발전할 순 있어도, 본질을 외면하고는 존속하기 어렵다.
-
2008 오스트리아 Kunst Uni. Graz Master Konzertgesang, Master Gesang
현재 스위스 베른 거주
Vokal Ensemble BeCant 단원
콘서트 솔리스트로 활동
2004 독일 Essen Folkwang Hochschule Musik Theater Dipl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