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없는 자리를 상상하다
2017. 8갓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문화재단에서 기금을 받아 전시를 준비하던 때, 지급한 인건비에 대한 원천징수세를 납세하러 세무서에 간 일이 있었다. 직업을 체크하는 박스 앞에서 조각과 설치 등 다매체를 다루던 나는 제일 먼저 ‘화가’를 발견했다. 눈을 빠르게 옮겨갔지만, 선택지들은 이미 목수, 의사 등의 다른 직업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선택지를 확인하고는 망설이다가 나는 화가 박스에 체크 표시를 했다. 화가라는 단어가 가진 예스러운 정겨움 때문에 그 감각은 우스움이나 재미있음에 가까웠지만, 그 기저에는 아주 가벼운 괴리감이 자리한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갑작스레 이의를 제기하며 “나는 화가가 아니라 미술가”라고 말한다면 나는 좀 더 나의 원래 모양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미술가 대신 예술가라고 한다면, 그 이름이 허락하는 더 큰 범위를 담보로, 그때서야 필요한 만큼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일까? 그러다가 화가에 해당하는 박스를 체크한 일을 시간을 들여 복기한다는 것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무서에서 업무를 보는 이들에게 그런 종류의 자의식은 일종의 민폐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박스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어릴 때 학교에서 나누어준 성격유형검사 설문지로 가닿는다. ‘매우 그렇다’에서 ‘매우 그렇지 않다’까지 숫자를 매기게끔 하는 답변 유형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무척이나 사로잡았다. ‘나는 의욕적이고 활동적입니다’, ‘나는 종종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습니다’와 같은 문항들도. 아주 오래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설문지 앞에서 느꼈던 한두 가지 흥분의 종류들은 아직도 어렴풋이 신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 ‘매우 그렇지 않다’, ‘매우 그렇다’는 박스에 체크 표시를 해나가면서 나라는 사람의 테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는 듯한 즐거움. 혹은 연필 끝을 한 칸이나 두 칸 옮겨감으로써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장난기 등.
성인이 되고 나서 가장 최근의 기억을 꼽자면, 당시 한창이던 우울감과 감정 기복이 개선 가능한 종류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신경정신과를 찾았을 때다. 진료에 앞서 간호사는 질문지 한 장을 볼펜과 함께 건네주었다. ‘나는 때때로 주변에 아무도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 ‘나는 때때로 내 앞날에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항목 옆에는 익숙한 모양의 박스들이 가지런했다. ‘다소 그렇다’는 답변은 나를 초기 우울증 환자가 되게 하고, ‘매우 그렇다’란 답변은 나를 만성 우울증 환자가 되게 하는 것일까? 만약 ‘매우 그렇지 않다’의 박스에 줄줄이 체크 표시를 한다면 그건 애초에 병원에 찾아온 노력과 수고를 무산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그때 느낀 감각은 결국 처음 성격유형검사 설문지를 들여다보던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조금 더 염세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결과를 위해서는 지표가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나의 기분을 선택지 안에 가둘 수 있느냐고 되묻는 사춘기적 저항이 있었던 듯하다.
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나를 부르는 이름이 없는 상태, 내가 속할 박스가 없는 상태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업을 지원해줄 곳을 찾고, 잠시나마 소속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어느새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원천징수세를 납부하기 위해서 직업군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 명단에 속하고 기금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나의 작업이 사회적 환원 가치가 있는지, 혹은 해당 분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언어화가 요구되었던 셈이다. 상대적이고도 애매한 성취의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서 때로는 매우 뚜렷한 기준들 앞에 섰다. 개인전을 치른 횟수가 몇 회인지, 문화적 기여가 공증된 기관에서 전시한 적이 있는지, 학력이나 수상 경력이 충분한지…
‘작가’나 ‘미술가’, ‘예술가’ 등 추상적이거나 내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상상했던 것들이 때로 선택 가능한 박스의 개수 차이에 의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선택할 수 없는 박스를 보는 일들은 매번 일정한 좌절감을 가져다주었고, 가능한 성취에 관해 서술하는 행위는 부끄러움과 생채기로 나를 덮쳤다. 때로는 내 작업이 “실험적”이기 때문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썼고, 또 “국제적”이기 때문에 “동시대 문화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썼다. 내 손으로 방금 적은 말들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쏟은 물을 주워 담듯 허둥거렸다. 한편 비슷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존재하는 박스에 나를 무사히 집어넣는 절차는 점차 매끄럽고 빨라져서 기이한 속도감과 쾌감을 동반하기도 했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 여전히 또렷이 말할 수 없는 것, 이름 지을 수 없는 것들을 더듬는 행위였기 때문에, 이런 대비는 때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게 했다.
그런 기묘하고 조그마한 혼란들의 내적 요동침에도 불구하고 박스 자체에 대해서는 대강 흐린 생각만을 품고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자주 그리고 너무나도 빨리, 박스는 눈에 잘 보이는 테두리일 뿐이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박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어떤 대답을 주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존재하지 않던 박스가 나타날 때 그것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박스에 대한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하고 강렬한 계기로 다시 찾아왔다. 석사 과정을 밟지 않은 나는 종종 관심 있는 학교의 입학 요강을 찾아보는 일을 습관처럼 하곤 했다. 친구의 추천으로 미디어를 다루는 프랑스 기관의 서류절차를 들여다보던 어느 날, 성별 선택 항목에서 male(남성), female(여성) 그리고 others(기타)를 발견했다. 정방형의 박스는 그간의 무수한 스크린 창과 서류들에서 보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었지만 내가 디디고 있던 지면을 부드러운 진동으로 흔들었다. 박스는 작지만 견고해 보였고, 나는 갑작스레 더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실감했다. 아주 많은 얼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우리’가 되는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박스의 존재는 분명 세상의 울퉁불퉁한 곡면들을 유연하게 절단해낸다. 1부터 5까지의 ‘매우 그렇다’와 ‘매우 그렇지 않다’ 사이에서 우리는 상태와 증상이 다섯 단계의 크고 작음 안으로 정렬되는 경험을 하고, 지표는 그사이에 존재하거나 사이를 초과하는 다른 명암을 뭉개기 마련이다. 가령, “매우 그런 나머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기조차 한다”거나 “매우 그렇다가도 매우 그렇지 않기를 반복한다”처럼 분명 존재하는 조각이지만 주어진 보기는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백지를 제출하거나 ‘매우 그렇다’로 수많은 박스의 대답을 통일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모두가 선택지를 고르는 일, 현실적 필요의 순간에 직면한다. 원천징수세를 납부하는 일이 당장 시급한 때처럼 말이다. 박스를 만들고 카테고리를 나누는 지표적 세계가 개인의 역사, 성향, 정체성, 증상, 성취 등의 고르지 않은 표면을 가진 세계와 맞닿는 지점에서, 우리는 박스에 대한 선택뿐 아니라 박스 자체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늘 함께 만난다.
그러나 ‘others’의 박스를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있을 곳을 상상하게 하는 자리로서의 박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재하는 것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박스의 힘을 실감했다. 그러자 박스를 안전하게 떠날 궁리만 했던 나는 내가 호명될 자리를 찾는 것 역시 떠나는 행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언제든 다른 박스를 추가하고 만드는 일을 상상할 수 있었다. 결국, 자리가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이자 충분조건이 된다. 아무것도 없어도 호명되는 자리가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그곳에 머무르는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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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낭만쟁취(인사미술공간, 2014)’ 외 ‘네리리키르르 하라라(서울시립미술관, 2016)’, ‘복행술(케이크갤러리, 2016)’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입체 매체를 위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