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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6

20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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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장애예술과 인권
_어쩌면 이상한 몸, 어쩌면 이상한 예술
글 이진희(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몸, 끝없는 이야기

“우리는 서로의 몸에 대해서 모르면 관계를 맺을 수 없다.1)

이 말은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왜, 어떻게 만나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깊은 성찰을 던져준다. 정상성의 억압이 강력한 사회에서 서로의 몸의 차이를 존중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한 자부심과 연대가 가능한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는 늘 어려운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을 떠나 살 수 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억압과 차별을 만나거나 공명하는 깊은 경험에 닿기도 한다. 완벽한 몸에 대한 정상성의 신화를 강요하는 사회 체제 안에서 나의 몸과 경험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삶을 거부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몸과 기억이 있는 한 오늘도 계속된다.


장애예술의 정치성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어서 그 장소와 공간, 시간 안에서만큼은 딱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죠. 그 안에서만큼은 내가 너무 명확해져요. 내가 계획한 ‘나’로 살 수 있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이하 춤허리) 배우 M)


장애여성 배우 M이 연극 무대에 서는 이유다. 내가 계획한 ‘나’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춤허리가 만드는 무대의 의미를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 역시 기획과 연출, 배우로 참여하고 있는 춤허리는 ‘장애여성의 삶과 예술을 무대로’라는 슬로건으로 20여 년 동안 활동해온 예술단체다. 지체장애여성과 발달장애여성이 주 구성원으로 ‘예술계’의 인정이나 안정적 ‘제도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몸으로 자유롭게 작업하고 스스로의 활동을 명명한다. 서로 다른 장애, 경험, 시간을 가진 몸들이 부딪히고 갈등하고 분투하며 삶의 무대 안팎에서 정상성에 도전한다. 시민의 자격을 박탈당한 장애인의 몸은 그가 서 있는 위치상 기존 질서에 도전을 던지는 질문을 품게 된다. 그래서 장애여성 배우들에게 무대란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장소’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다만


휠체어에 앉아 있지 않고


무대 위에 나타날 때, 나의 몸이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의 공연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예술’일 수 있는 걸까요?


대체 예술이란 뭘까요?


(연극 〈거북이라디오3〉 3막 ‘나는 예술가입니까?’ 중)

비정상의 몸으로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밀렸던 경험은 치료, 교육, 재활, 극복 담론들 속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질병이나 장애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재현되지만 전시되는 몸으로 서사될 뿐 ‘보여주는’ 주체가 되긴 어렵다.  결국 장애가 있고 아픈 사람은 정상성 신화, 의료와 사회복지 체계 안에서 타자화된다. 무엇이 예술인가? 누가 예술가인가? 예술계와 장애예술계는 어떤 기준으로 구분되는가? 무대에 서는 순간 사회가 장애예술과 비장애예술을 분리하려 하거나 예술적 수월성을 평가하는 동안, 무대에 서는 장애여성 배우들은 나를 배제한 채로 구성된 보편과 정상, 예술에 문제를 제기하며 질문을 던진다. 이런 도전이 빚어내는 긴장이 불화를 형성함으로써 동정이 아닌, 때론 충격과 마찰, 성찰과 동료되기 등 다양한 도전을 통해 공감의 토대로 쌓인다.

춤허리는 장애정치와 페미니즘이란 운동적 지향과 문화예술운동의 현장이란 목적의식으로 출발했다. 모든 장애예술 현장을 대변하긴 어렵지만, 장애와 예술에 대한 정치적 사유 없이 예술계 하위로서의 장애예술, 반드시 생물학적 장애인만을 포함해야 장애인 예술이라고 하는 정책의 손쉬운 정의가 오히려 장애차별과 그에 맞서는 정치, 장애예술인들의 분투와 첨예함을 소거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이러한 정의는 특히 장애예술, 장애인 예술의 정의와 범주 논의를 납작하게 하여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상 등록된 장애인의 예술로 정책을 단순화한다. 또한 많은 경우 장애인 복지 정책으로 보이게 하거나 ‘주류 예술계의 하부구조로서 장애인 예술’의 배치 2) 를 보여주며 장애예술을 더 차별적인 위치에 놓이게 한다.

장애예술 정책, 잔여적 복지 한계를 넘어서야

이는 기존의 사회가 인권, 복지제도란 이름으로 수행하는 많은 정책에서 보이는 한계와 유사하다. 장애, 성별, 인종,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나이, 출신 지역 등 다양한 차별의 구조를 반영한 정책은 없고 기존의 정상가족, 비장애인, 이성애자, 선주민, 성인 중심의 정책을 고수하며 소수자에 대한 정책은 잔여적 복지의 차원이거나 시혜의 차원에 머물게 두는 것이다. 장애예술 정책 역시 ‘장애인’이란 특정 인구집단에 대한 부수적 지원처럼 정책화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장애가 있는 예술인, 이들과 작업하는 동료 예술인이 처한 어려움을 발견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정책도 발견되기 어렵다. 장애예술의 정치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문화다양성이 문화예술장르의 다양성이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점, 그동안 문화의 영역에서 소홀히 다루어진 현 시점의 사회 현안과 깊이 맞닿아 있으며, 인권과 정체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모든 사회구성원의 평등한 공존과 문화의 발전을 추구 3)’한다는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권과 평등에 대한 감각 없이 장애가 있는 예술인과 동료가 되기 어렵고, 인권과 평등 정책이 부재한 국가에서 장애예술정책은 복지, 교육, 재활, 치료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조각나거나 여전히 잔여적 수혜로 남게 된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의 결과가 아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를 근거로 시행되어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이 조사는 장애예술인이 처한 현실만을 확인한다. 설문 결과로 예술전문교육을 받고자 할 때의 어려움은 전문교육기관·시설의 부족이 62.0%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그다음이 교육비 부담으로 56.1%를 차지했다. 전문교육기관·시설의 부족은 장애인 복지시설 중심으로 세팅된 장애예술인 지원제도 도입 및 교육의 한계, 그리고 비장애인 중심 전문교육기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조건 때문이다. 이는 기존 예술인 양성 프로그램, 예술학교 등의 공교육 안에서 장애학생의 교육권 문제와 연결된다. 예술활동 시작 경로로 ‘장애인 복지시설 및 프로그램’이라는 응답이 36.9%로 가장 높은 점, 지적·자폐성 장애의 경우 50% 이상이 장애인 복지시설을 통해 예술활동을 시작한다는 점에선 복지정책과 예술정책의 교차적 검토가 필요한 것이 확인된다. 이렇게 통합적이고 교차적인 접근 속에서 장애차별의 현실과 인권의 현주소를 통해 장애예술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구조적 차별을 포착하고 정책화해야 한다. 그러나 조사항목은 이런 총체적 구조에 대한 접근보다는 장애예술인의 경험을 여전히 ‘장애’에만 국한하여 질문함으로써 여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경험을 드러내거나 분석하기 어렵게 한다. 이런 설문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그저 ‘장애’ 때문에 더 열악한 집단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동어반복이 유지될 뿐이다.

우리의 예술이 노동이 되기 위하여

다시 내가 활동하는 춤허리의 연습공간으로 돌아와보자. 공연을 만들기 위해선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 관계를 만드는 일은 상대방을 통해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공연을 하는 것은 세상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연, 관계, 새로운 세상을 통해 이야기할 곳이 없어서, 혹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나의 경험을 말할 공간을 만들고, 일상적으로 나의 경험을 나누고 지지하는 동료를 만든다. 나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고, 역할을 만들고, 책임을 나누는 공적 공간을 창조한다. 온전히 장애 여성 배우들의 속도와 감각, 지향,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이 과정을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지만 ‘노동’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도 장애인이 겪는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지하철투쟁과 삭발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싸워가기 위해 진즉부터 나서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서울시에 ‘장애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만들었다. 이 권리생산노동4) 논의를 참조해 춤허리의 노동을 (또 수많은 장애예술인의 노동을) ‘예술생산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회적 토론이 부재하기 때문에 명명할 수 없지만, 앞으로 예술노동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함께 장애예술인의 노동권을 함께 고민해 가는 속에서 개념이 정리되길 바라본다. 이를 통해 장애예술을 기존 예술계의 하나의 갈래로 구분하여 취약계층 정책으로 협소화하지 않고, 노동의 개념을 재구성하며, 사회가 박탈한 권리를 되찾는 예술적인 연대를 상상해본다. 그럴 때 어쩌면 이상한 모든 몸들이, 장애와 예술과 인권이라는 어쩌면 이상한 예술로 새로운 상상력과 정책을 빚기를 꿈꿔본다.

1) 잡지 「공감」 1호, 번역글 〈몸의 정치학〉, 1999. 50-51쪽

2) 전지영. “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의 개념 논의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연구 -.32 (2021): 195-215. 200쪽
   전지영의 논의를 조금 더  덧붙인다. “‘장애인예술’을 넘어 ‘장애예술(disabilityarts)’이 보다 깊이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이 있느냐의 문제를 넘어 억압된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등한 인권을 고뇌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하는 예술’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와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전복적이고 인권지향적인 예술을 사고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the disabled’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된 존재라는 개념에서 장애예술의 이해가 출발이며, 장애인식개선 역시 복지 치료의 관점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관점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장애예술은 차별철폐와 인간적 삶의 평등함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논문 208쪽
(참고로 나는 이 논문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기 어렵지만-특히 현장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역동이 빚어내는 갈등과 불화를 통한 변화가 강조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의 개념에서 사회적 차별과 인권의 현주소를 중요한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주목한다)

3) 이완. 2019 문화다양성 주간행사 경남 문화다양성 포럼 자료집

4) 정창조는 2020년 장애여성공감 IL과 젠더포럼 ‘일할수록 살기 힘든 사람들(부제: 시설사회에 도전하는 동료 관계를 상상하며)’에서 〈‘재활’ 이념을 넘어, ‘신체의 정상화’를 넘어, 새로운 노동 개념으로 권리생산 노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권리생산노동 일자리 제도화 과정과 의미를 소개한다. “2017년 11월 장애인고용공단 충무로지사 점거 농성 이후, 진보적 장애인 운동계는 새로운 공공일자리로서의 ‘중증장애인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마련을 요구했다. 이후 2020년7월 1일 서울시에서 시범사업으로 이를 시행했고, 현재 서울시에서는 260명의 중증장애인이 이 일자리에서 노동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1. 권익 옹호 활동, 2. 문화예술 활동 3. 장애 인식 개선 강사 활동을 통하여 의 내용을 대중에게 홍보하고, 장애인 권리 침해에 대한 항의 투쟁 등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중략) 일자리의 명칭에서 ‘권리 중심’이라는 표현은 1. 여태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중증장애인들의 ‘노동의 권리’를 보장한다. 2. 이 일자리 노동자들은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을 수행한다는 두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편의상 ‘권리생산노동’으로 명명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