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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5 2016. 8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배우 길해연

한국에서 여성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엄마라서 죄송합니다"

2016. 8
칼럼사진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다 내 탓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연습실로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다른 배우들에게 미안해 고개를 숙여야 했고, 아이에게 미안해 눈물이 났습니다.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 나는 너무 많은 이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고 그래서 또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힘든 얼굴, 지친 표정 보이면 프로가 아니라고 할까 봐 나는 매일 거울 보며 웃는 연습을 했습니다. 내 문제니까, 내 개인적인 사정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결하고 견뎌야 한다고, 아이를 키우면서 연극하는 내내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임신이라는 얘기를 듣고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연극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유명배우가 아니니 은퇴 기자회견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서둘러 출산 후 활동은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는 것도 아닌데 나는 혼자 “연극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기 키우는 일에 전념할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다졌습니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를 떠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당시 내 상황으로는 출산 후 활동은 손이 닿지 않는 포도송이였으니까요.
그런 내게 어느 날 신 포도 한 송이가 뚝 떨어졌습니다. 극단에서 연락이 온 겁니다. 사흘 동안만 하는 공연이니 어렵겠지만 어떻게 시간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사흘 공연이지 매일매일 연습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공연 기간에는 지방에 있어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습니다.
기댈 곳이라고는 오래전부터 연극하는 걸 싫어하다 못해 끔찍하다 여기며 반대하셨던 친정엄마뿐이었습니다. 눈치를 보며 맴만 돌고 있는데 다시 재촉 전화가 왔습니다. 일단 나와 보란 말에 나는 못 이기는 척 후배가 집 앞에 찾아 왔다 핑계를 대고 아이를 엄마에게 맡겼습니다. 멀리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동네 가게 갈 때 신는 슬리퍼를 신고 나서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무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매일 슬리퍼를 신고 허겁지겁 연습실을 향해 뛰었고 눈치 보여 대본을 못 들고 나가는 일에 대비해 연습실에 대본 하나를 따로 두고, 후배에게도 한 부를 따로 맡겨두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손바닥에 뚝 떨어진 포도가 가시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되어 나를 피 흘리게 했고,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가 되어 내 고개를 찍어 눌렀습니다. 희한하게도 아이는 내가 자리를 비울 때 아프거나 다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육아에 지치신 어머니는 당신이 하지 말라는 연극을 하는 딸에게 맘껏 모진 말을 퍼부어대셨습니다. 그때 가장 여러 번 반복된 말은 “돈도 안 되는 연극 한다고”였습니다. 돈도 안 되는 연극, 너무나 맞는 말씀인지라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저 견디는 수밖에요. 사실 그런 주변의 비난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자책감이었습니다. 엄마랑 같이 있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달래고 얼러서 억지로 떼어 놓고 돌아서면 마음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좋아하는 일 하겠다고 아이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해도 되는 거야?”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학교에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며 지냈는데 막상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되니 미안해야 할 대상은 더 광범위해졌습니다. 학교에서 엄마가 할 일을 나눠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다른 엄마들에게 미안하고, 혹시 그런 것들 때문에 아이가 뒤처지는 건 아닐지 가뜩이나 숙어진 고개가 더 숙어졌습니다. 그즈음 주변에서 아이가 학교 다닐 나이가 되면 무대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자식이 다 크는 나이란 없는 것 같아.”
연습하다가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뛰어갔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프다고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의사와 간호사가 강제로 붙잡고 상처를 꿰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간신히 눈물을 참고 서 있는 내게 어머님이 서늘한 눈빛으로 물으셨습니다. “너 뭐하는 사람이냐?” 그때 가슴에 뼈아프게 박힌 그 말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습니다. “정말 난 뭐하는 사람일까?” 난 분명 연극배우인데 난 그 말을 당당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의 따가운 눈총과 자책감에 시달리지만, 연극을 하러 가서는 이해받고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연습시간을 정하는데 어린이집 시간에 맞춰 낮에만 가능하다고 했던 어떤 배우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그 배우 자리에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다른 배우가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시간이 도저히 맞지 않아서 합의하에 그만뒀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일은 온전히 내 개인사일뿐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내 문제니까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집안에서 전쟁을 치르고 나서서 극장으로 향하는 동안 난 웃음의 가면을 쓰고 온몸에 남아있는 지침과 힘듦의 자국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항상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나는 무대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울며불며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던 아이는 군대를 다녀와 이제는 밖에서 만나자고 해도 시간 없다며 엄마를 따돌립니다.

이제껏 지나온 일들을 늘어놓은 것은 힘든 시간 잘 넘기고 지금은 괜찮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잘 견디시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문제니까, 내 일이니까, 내 책임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 긴 시간 어둡고 험한 길을, 불편한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오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그런 생각이 든 겁니다. 재능 있고 능력 있는 후배가 어느 날 투명 인간처럼 사라집니다. 대부분 임신과 출산, 육아에 발목을 잡혀 무대로 못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까 봐 결혼과 출산의 계획을 아예 인생 계획에서 빼버리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본인이 결혼할 생각이 없었을 때, 아이를 데리고 연습실에 오는 후배를 맹렬하게 비난하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결혼해 아이를 낳더니 아예 무대에 대한 꿈은 입 밖에도 내지 않습니다. 재능과 열정이 아까워 넌지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그 친구 입에선 긴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습니다. “언니, 나는 그때 아이 때문에 늦고 아이 때문에 어쩌고저쩌고하는 친구들이 싫었어. 애나 잘 키우지, 왜 나와서 민폐를 끼치나 생각했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그래서 난 그런 민폐 끼치기 싫어.” 민폐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나라에서 연극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민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연극인에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연극인 중에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남자들도 똑같은 상황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제도적 차원의 보호가 있지 않은 한 각자 알아서 살아남기엔 너무나 힘든 여건입니다.
재능 있고 능력 있는 배우들이 출산과 육아로 사라지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합니다.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님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아이 낳은 예술가들을 사회에 민폐나 끼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 더는 죄가 되지 않는 그런 시대가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다음 세대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 배우 길해연 사진
  • 배우 길해연1986년 극단 '작은 신화' 창단 단원으로 연극활동 시작, 2015년 제 25회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했다.
    연극,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 드라마 〈워킹 맘 육아 대디〉에서 '육아 대디' 박건형의
    어머니 이해순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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