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보는 ‘표준계약서’
2019. 6
임애리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자문변호사)
예술인들은 전통적으로 폐쇄된 시장 구조 속에서 밀접한 인적 관계에 터잡아 거래해 왔기 때문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계약서를 작성하더라도 사업자가 예술인의 창작물을 포괄적으로 이용하도록 하거나 독점 계약 기간을 과도하게 장기간으로 설정하는 등 예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관행이 있었다. 반면 크레딧(credit, 저작자의 성명을 저작물에 표시하는 것), 저작권 귀속 문제 등 문화예술 분야에 특수한 권리관계도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표준계약서는 이러한 거래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예술인에게 불공정한 계약 조건을 강요하는 관행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현재 문화예술 분야의 표준계약서는 고시된 것만 9개 분야, 56종에 달하지만 분야별로 표준계약서의 활용 정도는 다르다. 영화 분야에서는 2018년 기준 표준계약서로 계약한 경험이 있는 영화 스태프가 74.8%로 표준계약서의 활용이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영화진흥위원회). 이는 영화노조가 영화제작가협회, 영화진흥위원회 등과 함께 한국영화산업 노사정 이행협약을 체결하여 표준계약서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성과다. 2015. 4월 통과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조의 4에서 영화업자는 영화근로자와 계약을 체결할 때 영화근로자의 임금, 근로시간 및 그 밖의 근로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된 것도 영화 분야에 표준계약서가 정착되는 데 힘을 실었다. 반면 방송 분야의 경우 아직도 표준계약서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착취 문제가 사회 문제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9개 분야, 56종의 표준계약서 고시56종 표준계약서의 모든 조항을 여기에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표준계약서의 기본적인 구조나 필수적인 기재 사항은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문화예술계 표준계약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노무 제공형 계약과 저작권 이용형 계약이다. 노무 제공형 계약은 영화 〈기생충〉의 스태프들이 체결한 근로계약과 같이 영화, 공연, 방송 등 종합예술 저작물의 완성을 위해 복수의 스태프들이 제작사에 노무를 제공하는 형태의 계약이다. 공연예술 분야의 기술지원 계약, 방송영상프로그램이나 영화 스태프의 근로계약이 이 분류에 해당한다. 반면 저작권 이용형 계약은 예술인이 독립적으로 완성한 창작물을 거래하기 위하여 창작물의 저작권을 화랑, 출판사 등에 위탁·이용허락·양도하는 계약이다. 물론 예술인 간의 공동저작계약, 예술활동 전반의 기획과 관리를 위한 매니지먼트사나 에이전시와의 전속계약, 영화 분야의 투자계약이나 상영계약 등 위 두 가지 유형에 포섭되지 않는 특수한 형태의 계약도 있다.
노무 제공형 계약에서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에 준하여 근로환경, 4대 보험 가입, 부당해고금지 등 실질적인 근로권의 보장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저작권 이용형 계약은 창작물에 대한 권리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에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계약의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상담을 해 보면 예술인 대부분이 정당한 대가의 액수나 지급 방법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대가로 상대방이 갖는 권리 범위에 관한 사항을 의외로 간과하곤 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에게 더 많은 권리를 줄수록 예술인이 받는 대가는 더 커져야 한다. 예컨대 해외 판권과 2차적 저작물 작성권, 계약 종료 후의 전자출판권, 장래에 개발될 매체에까지 저작물을 제공할 독점적 권리 등이 계약서에 포함된 경우 표준계약서보다 상대방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지 반드시 비교해 보고 협상을 통해 권리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 문화예술계 표준계약서
표준계약서는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모델 계약서로서 계약 당사자가 계약 내용을 미리 예측하고 계약 체결을 준비하기 쉽게 해 준다. 더 나아가서 표준계약서는 예술인 개인에게 계약서의 초안을 작성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준다. 이는 상대방이 제시한 계약서를 읽어 보고 날인만 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넘어서 계약의 세부 내용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상대방이 제시한 계약서를 표준계약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중요한 조항 일부만이라도 표준계약서를 따르도록 협상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표준계약서가 협상에서 상대적 약자인 예술인을 보호하는 규정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표준계약서의 연구·개발 과정을 보면 예술인뿐만 아니라 거래상대방의 의견도 공청회 등을 통해 반영하고 있으므로 표준계약서의 모든 내용이 반드시 예술인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 표준계약서에 따라 계약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중요한 조항을 계약 체결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이해한 후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필자를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 보면 분쟁이 발생하고 나서 권리 구제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보다 계약을 체결하기 전 미리 법률상담을 받고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려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표준계약서를 소개해 주면 생소해 하는 반응이 많은데 이 또한 나아지리라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