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선(성우)
역사가 된 목소리, 제2의 삶을 살다
2018. 8〈은하철도 999〉 메텔의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뽀빠이〉 속 올리브의 목소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는?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 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목소리는 어떤가? 60년대 후반부터 TV를 본 세대라면 숱하게 마주쳤을 그 목소리의 주인, 정희선 씨를 만났다. 본인조차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작품에서 주연급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한 그는 오래전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그 목소리로 메텔이 되었다가, 올리브와 마리아 수녀였다가, 클레오파트라로 시종일관 밝게 인터뷰를 이끌면서 첫 만남이면서도 첫 만남 같지 않은 묘한 시간을 선사했다. 글 김지승, 사진 이현석
‘성우’는 1954년 KBS를 시작으로 1955년 CBS(기독교방송), 1961년 MBC, 1963년 DBS(동아방송), 1964년 TBC(동양방송)에서 순차적으로 공채모집하면서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사단법인 한국성우협회가 창립된 게 1964년이고, 정희선(1948년생) 씨가 MBC 성우 3기로 입사한 게 1968년의 일이니, 그가 한국 성우 역사를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그리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당신 MBC는 영화부에서 성우를 뽑았는데 외화 더빙이 적어지면서 성우 채용이나 활동 사정은 이전과 달라졌다.
이젠 옛일이 되었지만 외화 더빙이 한창이던 그 시절,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가 배우 이상으로 사랑받기도 했던 그때 그 인기 꼭대기에 정희선 씨가 있었다. 애니메이션, 외국 영화, 라디오 드라마 할 것 없이 각종 장르를 종횡무진 누빈 그 목소리는 특히 시청자의 유년기 기억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그 시절 문을 여는 열쇠 혹은 주문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인터뷰 중 잠깐 눈을 감고 듣게 된 그 목소리는 먼 과거의 한때로 우리를 데려갔다.
목소리가 친숙하니까 전부터 알고 지낸 분 같아요.그런 말 많이 들어요. 처음 만나자마자 제가 예전에 맡은 배역 중 자기가 좋아했던 배역 목소리를 한 번만 들려줄 수 없겠냐는 요청도 자주 듣고요. 귀찮지 않냐고요? 아니요. 기억해주는 게 고맙죠. 성우라는 게 참 복된 직업이다 싶을 때가 있어요. 나이를 이만큼 먹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고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특별할 것 없이 여유롭게 지내고 있어요. 방송이 많지 않아서 예전보다 자주 자연을 보러 교외로 나가요.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식구, 친구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다녀요. 어떻게 그렇게 살았지 싶을 만큼 바쁘게,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여유가 더 값지고 감사해요.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에도 참여하고 계시죠?
작년부터였죠. 2017년엔 한화생명 상담사 치유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콜센터 상담사를 위한 예술 힐링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나도 목소리 주인공이다’란 타이틀을 걸고 고객상담에 지친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는데 무척 보람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목소리 연기에 중요한 발성, 호흡을 가르치는 선에서만 진행하다가 언어를 쓰는 방식으로 확대되었고, 그러다 보니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언어는 삶과 뗄 수 없잖아요.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이 듯이요.
올해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담사들을 대상으로 치유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에요. ‘아름다운 언어’라는 타이틀로 스트레스 푸는 방법, 호흡법, 발성법, 동화구연, 시낭송 등을 함께해요. 내 마음에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느끼는 방법도요. 연기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하다보니까 그게 희노애락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가르치는 거더라고요. 상담사들은 자기 감정을 누르고 참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일할 때야 어쩔 수 없더라도 가능한 표현하고 참지 않도록 화내는 연기, 따뜻한 정서를 표현하는 연기, 슬픔 연기 등을 같이 해요. 슬픔도 치유가 되거든요. 지금까지는 함께하는 분들 반응이 무척 좋아요. 오늘도 활동을 하고 왔어요. 어머니 마음을 주제로 쓴 시낭송을 했는데 많이들 우시더라고요. 맘껏 울 수 있는 것도 좋잖아요.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덕분에 좋은 분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4년 전으로 기억해요. 성우협회 연수에 재단 소개차 방문하셨더라고요. 평소 후배 양성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재능기부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남편과 먼저 경험했던 친구들이 추천을 했어요.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고 참여하는 사람도 치유를 받게 된다면서요. 그래도 재단 직원 분들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으면 못 했을 일이에요. 정말 과정 하나하나에 다 도움을 주셨어요.
수천 편의 작품 속 주연으로 살다 정희선 성우가 맡았던 배역들. 왼쪽 상단부터 만화 〈뽀바이〉의 올리브,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철이 엄마, 〈스타워즈〉의 레아공주 , 〈로마의 휴일〉의 앤공주,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클레오파트라〉의 클레오파트라 등 작품 얘기를 해볼까요? 그동안 맡았던 배역들 다 기억 못하시죠?네. 다 못하죠(웃음).
그래도 기억하시는 배역이 있다면요?음…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만화 〈뽀바이〉의 올리브,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철이 엄마, 〈소공녀 세라〉의 몰리, 〈들장미 소녀 캔디〉의 프라니와 수잔나, 〈빨간머리 앤〉의 앤까지가 애니메이션이고요. 영화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마더 테레사〉의 올리비아 허시가 분한 테레사 수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가 분한 스칼렛 오하라,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해바라기〉의 소피아 로렌이 분한 지오바나,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역, 〈사랑과 영혼〉의 데미 무어 역,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여주인공 역도 했어요.
지금 떠오르는 배역마다 목소리 연기를 해주셨잖아요? 대사를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그러게요. 배역이 떠오르니까 대사가 바로 생각나네요. 쭉 떠올리고 보니 그냥 평생 목소리 연기자 일을 하면서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맡은 배역 중 저와 좀 비슷한 캐릭터랄까, 지향했던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그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인데요, 그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래요. 외화 목소리 연기를 하면서 전 세계를 다 누비고 다닌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꼈고요, 영화 속 배역에 푹 빠져서 몰입도가 굉장히 높았어요. 수천 편을 연기하며 매순간 그 인물의 온갖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는데, 그러다 보니까 저는 스트레스를 쌓아놓지 않고 나도 모르게 그 안에서 풀게 되더라고요. 기회가 닿으면 그 경험에서 얻게 된 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언어사용과 톤에 대해서, 목소리에 담는 마음에 대해서. 감정을 담아두지 않고 풀어놓는 방법도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제가 살아온 시간과 특별했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면 좋겠어요.
주인공 전문이셨더라고요. 보통 더빙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어쩌다 보니 주인공을 독점했어요(웃음). 명절 때 각 방송사에서 외화를 틀어주는 시간대가 있었는데 채널을 바꾸는 족족 제 목소리가 들리는 거죠. 명절이면 방송 채널마다 정희선 목소리가 들린다고 할 정도였어요.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최선을 다해서 배역에 몰입했고, 한 가지 목소리가 아닌 다양한 목소리를 냈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주어진 일에 집중하는 건 자신 있었거든요.
더빙 작업은 보통 오전에 나와서 대본 받아 입 맞춰 보고 오후에 녹음을 했죠. 라디오 드라마는 연습을 했고, 외화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외화 더빙 초기에는 피디 앞에서 리딩을 하기도 했고요. 〈삼손과 데릴라〉, 〈초원의 집〉, 〈타잔〉 등을 그렇게 했던 것 같네요. 연속극 50분 방송이면 1시간 10분 정도 녹음했고요.
없죠. 원 없이 일했어요. 안 해 본 배역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일은 그런데 엄마로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무남독녀 외딸로 살다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어요.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았죠. 아마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유명한 외화, 라디오 드라마, 애니메이션 외에도 〈모여라 꿈동산〉, 〈뽀뽀뽀〉까지 다 했어요. TBC, KBS 일까지 맡게 되면서 정신없이 바빴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사랑할 시간이 없었어요. 성우 일을 하면서 자식들한테 제일 미안했어요. 그래도 잘 커준 게 고맙죠.
외화 더빙이 사라지며 느낀 박탈감삶의 전환 계기 만들어 예술인으로 겪은 고비랄까,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요?
마음에 제일 큰 상처를 입었을 때가 있었어요. 갑자기 외화가 싹 사라지고 할 일이 사라졌거든요. 외화 더빙할 일이 없어진 거죠. 제 앞에 펼쳐져 있던 길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길이 딱 끊긴 거예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았어요. 박탈감, 허탈감, 소외감 등이 한꺼번에 찾아오더라고요. 우울증이 오고도 남을 상황이었죠. 그동안 해온 경험이, 그 시간들이 갑자기 아무 소용없는 게 된 거예요. 받아들이기까지 꽤 힘들었어요.
늘 주연이었던 분에게는 더 그랬을 것 같아요. 어떻게 받아들이셨어요?생각을 다르게 했어요. 남을 위해서 지금껏 목소리를 쓴 나를 이제 사랑하자고요. 불행이 오면 불행과도 같이 가자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으로는 ‘이젠 자유다’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어요. 참 놀라운 게, 현역에 있을 때는 제 나이를 인식하지 못했어요. 일을 한창 하는 중에는 제 나이가 이만큼 들었단 걸 까맣게 몰랐어요. 꿈같은 영화 속에서만 살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죠. 다시 적응을 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제 나이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아들들하고도 충분히 시간을 갖고,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시기를 거치리라 생각해요. 나이를 먹으면서, 일을 예전처럼 못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으면서,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막막해지면서 저처럼 박탈감, 허탈감, 소외감을 느끼겠죠. 그래도 삶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여전히 예술인으로서의 감각은 살아 있어서 어디서나 쉽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고, 또한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우리가 주목 받고 소위 잘 나갈 때, 반대로 외면당하고 못 나갈 때 모두 얻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어요.
시인이 언어에 예민하듯 성우는 목소리에 예민하겠죠?맞아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목소리에 정말 많은 게 담겨요. 목소리는 목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폐와 성대, 구강과 입술이 함께 만들어내는 건데 더 깊이 따져보면 몸 전체로 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마음과 감정도 담기죠. 그러니까 저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사실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닌지, 너무 과장하거나 체하는 건 아닌지… 목소리를 들으면 짐작할 수 있어요. 제가 그 정도 알 수 있을 만큼의 경력은 되는 거죠. 요즘 자주 느껴요. 목소리에 진심이 없는 사람들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가짜 인생을 사는 거죠.
성우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보통 성우를 ‘천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죠. 이 말이 단순히 목소리를 다양하게 낸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자기 목소리를 활용해서 다양한 역할과 상황에 맞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순발력과 센스, 창의력과 독해력이 필요하다는 의미거든요. 목소리의 원리와 운용능력도 알고 있어야겠지만 그런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개성과 철학, 풍부한 감성이 더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을 단련시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각자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바라는 점이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재단이 생긴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인에게 법적 정년이 없긴 해도, 그냥 돌연 예술인으로는 끝나는 시점이 와요. 상황 때문이든, 예술인 개인 사정 때문이든 또, 외화 더빙이 사라지듯 어떤 사회문화적 변화 때문이든 그렇게 돼요. 그럴 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자괴감을 느끼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거 순간이거든요. 재단 덕분에 희망이 생긴 거예요. 아직도 제 잠재능력을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과 자긍심이 되어 주는지 몰라요.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