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도착한 질문들
2017. 8“나의 창조활동이 나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극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은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 고발 위에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세운 작품이다. 1개의 극단(앤드시어터)이 총괄 제작하고 4개 극단(극단 불의전차·신야·잣프로젝트·907)이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형식에 참여, 최종 우승팀이 상금 1,800만 원을 획득하게 되는 형식이 파격적이었던 만큼 제작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이 불가피했다. 관객도 예외가 아니었다. 글 김지승, 사진 이현석
한국 최초 서바이벌 오디션 리얼리티 쇼 연극이라는 홍보문구는 당연하게도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을 굳이 연극에 가져왔을 때 관객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형식에서 돌출할 수 있는 질문들일 것이다.
관람 후 10분간 몇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관객들의 입에서 다양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투표는 진짜인가? 그럼 다른 팀은 돈을 한 푼도 못 받게 되는 건가? 꼭 경쟁해야 하나? 이걸 왜 하는 거지? 누군가는 불편해했고, 누군가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다른 연극 무대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이 10분의 시간 동안 전윤환 연출가는 객석 맨 위에서 관객들의 웅성거림과 움직임을 극의 한 부분인 양 응시하고 있었다.
2015년에는 앤드씨어터 극단 내에서 경쟁시스템을 만들어 단원들끼리 경쟁하는 방식이었다. 극단은 비슷한 세계관과 삶의 지향점을 연극으로 발화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걸 간과했다. 한 극단 내에서는 의견이 쉽게 모이고 갈등은 곧 느슨해졌으며 결과적으로 경쟁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이번 공연에선 다섯 개 극단이 가진 예술관, 삶의 가치, 지향점 등이 다 달랐다. 한 극단 내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경쟁이 가능해진 이유다. 어떤 안건이든 합의를 이루어내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사소한 안건까지도. 이 작업을 통해서 민주적 절차로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양상을 이상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게 처음 의도였다.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것이고 어려운 일인지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경쟁과 공공성을 바라보는 각 팀의 관점이 굉장히 달랐다. 극단들의 색깔이 다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업방식이 다른 네 극단을 불렀으니까. 작업방식은 결국 그들의 공통된 세계관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렇더라도 그 차이가 짐작보다 컸다.
경쟁구도를 바라보는 극단들의 시각이 공연 전후로 달라진 부분이 있나?작업을 진행하면서 네 극단의 시점이 갈라지는 틈도 꽤 있을 것 같다. 명확히 말할 순 없지만 경쟁구도를 바라보는 원래의 관점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는, 또 이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공연이 다 끝나면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창조활동이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 한편에 경쟁시스템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답변할 수 없다. ‘경쟁구도가 창조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이 작업을 시작한 거다. 어떤 것을 내가 판단하고 그것을 참여자나 관객들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은 없었다. 내 창조활동이나 경제활동에 도움은 되든 혹은 되지 않든 경쟁구도는 과도하게 존재한다. 지원 제도나 예술상, 문화권력, 문화계급… 그것들이 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작품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혹은 경제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을 직접 극으로 경험함으로써 제대로 마주해보고 싶었다.
연출가의 잠정적 답이 궁금했다. 경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거나.작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건 중심잡기였다. 내가 어떤 답도 하지 않는 것. 극 속 하이네 뮐러의 문구처럼 내게 흥미로운 건 질문이다. 잠정적 답을 내려놓고 이 작업을 하게 되면, 나와 그 답이 비슷한 극단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 만들어질 우려가 있다. 공연이 이만큼 진행된 상황에서도 이 작업으로 어떤 답을 얻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발생한 질문들을 토대로 우리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거지, 어떤 답을 얻거나 듣고 싶은 건 아니다.
언제나 무수한 경쟁구도를 감지한다. 고유한 작품을 올린다고 해도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경쟁구도 안에서 대상화된다. 그렇게 만드는 시선들을 항상 느끼고 있다. 때로 그 시선을 이용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 시선으로 나의 창작세계가 망가진다. 내 안에서도 경쟁구도에 대해 굉장한 모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 작업 역시 경쟁과 공공성, 창조와 경제처럼 상호 모순되는 언어들이 붙어서 충돌하며 야기하는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그 현상 자체를 공연으로 올린 거다.
나는 갈등을 믿는다. 그 외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내 작업에서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갈등에 대한, 모순과 대결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키는 일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답과 해결은 내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나는 어떤 대답이나 해결도 제공해줄 수 없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들이다.
- 하이네 뮐러 Heiner Muller
보통 한 사람의 삶의 태도나 지향점이 이동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다. 투표를 하는 10분 동안, 그 짧은 시간에도 처음 투표한 선택지에서 다른 선택지로 이동하거나 투표의 추이를 보면서 몸을 이동시키는 관객들을 보고 생각이 달라진 면이 있다. 창작자들 역시 공연 과정에서 그런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경험과 질문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태도나 지향점이 내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긴 했다. 기획의 가장 핵심적인 의도는 하이네 뮐러의 문구 안에 다 들어있다. 경험과 체험이 중요하다는, 이 작업이 끝나고 난 뒤에 알게 될 것이라는 문구를 나 자신과 창작자 전원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던지는 셈이다. 경험이 끝나고 난 뒤에 어떤 답이 나에게 오게 되긴 할 거다. 하지만 그 답도 계속 이동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제도 안에 편입될 수 있는가, 혹은 공공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사회적 합의가 안 된 것 같다. 이 공공재를 예술에 써도 좋을지, 공공재가 예술에 투자되어야 하는지, 복지 차원에서 사용해도 되는 건지 예술인, 시민, 제도 내에서도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은 채 다른 나라의 모델을 그냥 가져온 형국이다. 예술계 안에서조차 예술이 노동이냐 아니냐부터, 공공재로 만든 작업은 시민 다수의 공익을 우선시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냐, 그럼 예술은 공공재냐 등등 질문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관객들 중에는 이건 예술계의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물어보느냐, 너희 안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냐고 반응하는 분도 계신다. 하지만 공공극장은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우리가 받는 재단 기금도 시민의 세금에서 나온다. 그래서 합의의 대상이자 주체인 시민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런 이야기들이,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이제야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인 복지제도가 개입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예술, 예술인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면 좋겠다.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 정책 실천과 교육이나 삶의 전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복지사업 지원절차 간소화를 꼽을 수 있겠다. 예술인 입장에서 지원을 받는 과정은 곧 자신의 가난함, 더 나아가서는 가족의 가난함을 증명해야 하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 가난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그 안에서 누가 더 가난하고 힘든지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지원을 받으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난하다는 게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개인의 가장 사적인 부분이 다 까발려지는 거다. 재원이 한정적이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가난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경쟁하게 하는 잣대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조건이 개선되길 바란다.
극에서 문단권력, 출판시장을 비판하는 천명관 소설가의 인터뷰를 길게 인용했다. 공연예술계 쪽 비판에도 유효하기 때문이었나?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다. 신인들의 작업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비슷한 흐름으로 가고 있는 건데 소위 어르신들의 평가 때문이다. 그들의 평가에 따라서 작업 지속 여부가 결정된다. 한 사람이 잘 되면 그 언어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게 되는 구조다. 자기 언어는 어느새 지워지고 좋은 평가를 받은 언어들을 다 같이 공유하게 된다.
천 작가의 발언이 가능했던 조건이 물론 있겠지만 한 개인에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침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문제의식이 틈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게 중요하다.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발언하고 균열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특정 극단의 지인들이 관객 다수를 차지할 경우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텐데 사전에 합의한 부분이 있나?우리가 합의한 건 ‘모두 한 명의 시민으로 주체성을 인정하자’였다. 지인이 속한 극단에 투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 극이 끝난 후 본인에게 다시 질문이 돌아올 수 있고, 어떤 책임을 느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밖에서도 그런 일들은 흔하고 그다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의 선택을 제한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논의 과정에서 전문가에게 투표권을 더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밖에서는 그들이 실제로 100% 권한을 행사하니까. 현실을 반영해 전문가와 시민에게 각각 50%씩의 투표권을 주자는 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한 명 한 명의 시민들과 사회적 합의를 하고 싶고, 공공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평등하게 투표권을 주고 제한하지 말자고 의견이 모였다.
극단들과의 합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작은 안건이라도 모두 합의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과정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내가 그와 다르다는 걸 내 언어로 드러내야 했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 의견들을 들어야 했고. 이 시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불편했다. 그런 시간을 겪어내야만 싸우든, 동의하든, 합의하든, 이탈하든 어떤 시간이 찾아오는 건데 내가 가진 언어로 나를 드러내는 그 첫 출발점이 너무 어려웠다. 그런 과정을 통해 투표방식이 정해졌다. 비밀투표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사회적 합의의 시작은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서 공적 자리에서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불편하더라도. 결국 공공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체험하면서 획득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관객들의 반응도 다양하리라 생각한다. 직접 접한 게 있나?질문이 다양한 것처럼 반응도 그랬다.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토로하는 관객들도 많았다. 1,800만 원에 동의한 적이 없다, 왜 투표를 요구해서 불편하게 하느냐, 왜 공개투표를 하게 하느냐, 상금이 퍼포먼스가 아니라면 실재를 그대로 올려놓은 거 아니냐, 현실에서는 경쟁을 선택할 수 없는데 관점이 나이브하다 등등 한곳으로 모아지는 듯하면서도 다른 게 많았다. 질문은 어쨌든 발생할 거라 예상했는데 극이 끝나고 로비에서 기다렸다가 질문을 던지거나, 투표시간 10분 동안 사회자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마지막 공연 이후에는 관객들뿐 아니라 극장, 재단, 창작자들에게도 더 많은 질문들이 발생할 거라고 짐작한다. 이걸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공연이 다 끝난 후가 더 걱정이다.
끝으로, 극을 보고 관객들이 꼭 가져가길 바라는 질문이 있다면?나 역시 너무 많은 질문과 만나고 있다. 과정부터 지금까지.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들을 가져가면 되지 않을까. 그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거다.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 둔 7월 15일, 8회차 공연 후에는 시인이자 사회학자 심보선의 사회로 〈창조경제-공공극장편〉에 참여한 연출가들과 관객들의 대담이 마련되었다. 인터뷰로 만난 ‘앤드시어터’의 전윤환 총연출을 포함, ‘907’의 설유진, ‘극단 불의전차’의 변영진, ‘신야’의 신아리, ‘잣프로젝트’의 이재민 총 다섯 명의 연출가들은 작품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과정과 심경을 관객들 앞에서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서바이벌로 시작하지만 진행하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제안과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서바이벌이라는 제안을 각각 수락한 네 극단의 첨예한 의견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총연출의 사과로 시작해 타협일 수밖에 없는 협의를 거쳐 현재의 형식으로 작품을 진행하면서 서바이벌 경쟁을 고수한 극단은 관객을 포함한 공공의 적이 되었다. 결국 모두가 상처받았다는 슬픔과 시스템 안에서의 무력감, 상황에 대한 분노 등 다양한 감정들을 쏟아낸 연출가들은 한편, 접점이 없었을 전혀 다른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수긍했다. 각자가 선택한 방향을 동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작품 자체는 응원하고 서로 배제하지 않으며 룰 안에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9회차 공연을 끝으로 〈창조경제-공공극장편〉은 막을 내렸다. 투표 결과 관객 다수가 경쟁에 찬성했고, ‘극단 불의전차’가 최종 우승팀이 되었으며, 상금 1,800만 원은 우승팀에게 전액 돌아갔다. 결과만 보면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완성된 네 극단의 작품과 그것을 경쟁 시스템 안에 재배열한 한 극단의 기획과 연출, 관객들의 갈등과 불편함은 현 경쟁 시스템뿐 아니라 예술과 연결된 문제와 질문들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겨우 도착했거나,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