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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5 2017. 6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시인 김안

풍경의 조각보

2017. 6
풍경의 조각보

“○○ 아빠, 26층부터예요.”
“응.”

‘잠깐만요’ 하는 소리에 엘리베이터 문을 여니 커다란 택배 더미 뒤에서 오십 대로 보이는 부부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끙끙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짐을 실었습니다. 밤 11시 30분. 마침 그날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터라, 텔레비전으로 개표 방송을 보며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선 다시 들어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택배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한 채 짐을 분류하던 택배 기사가 바로 이 부부였었죠. 내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가지고 주차장 근처 벤치로 와 맥주를 마시고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시간 동안 그 부부는 열심히 짐을 분류했을 터입니다.

“아이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세요?”
“예, 오늘 이 일을 처음 해서요. 물량이 넘쳐서 300개가 넘었어요. 그래도 거의 다 끝나가요.”

남성분이 답했습니다. 그 부부의 얼굴에서 어떤 보람도 희망도, 심지어 절망이나 불우함도 느끼지 못한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요?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부부의 내력, 이 시간까지 혼자 집에 있을지 모를 부부의 자식에 대한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고생하시라는 인사를 하고서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 앞에 앉으니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는 대선 결과 뉴스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생활의 피부와 너무나 멀리 있어서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생활로 내려앉은, 실감하는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상상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터였지만, 그래도 잠시 잠깐 어떤 희망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던 내 머릿속은 “○○ 아빠”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는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열광하는 모습들과 자칭, 타칭 전문가들의 향후 전망 등이 가득했지만 실상 우리의 일상은 그 속에 없었습니다. 하찮기만 한 이 일상의 풍경이 비집고 들어갈 아주 작은 틈조차 없었습니다.

가타라니 고진은 “풍경이란 하나의 인식 틀이며, 일단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된다”(가타라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일에 내가 본 두 개의 풍경―텔레비전으로 보여지는 희망에 가득 찬 풍경과 같은 시간 내가 본 일상의 어떤 풍경. 환호와 끝나지 않는 노동, 나는 이 두 개의 풍경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전자의 풍경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 풍경이 만들어낸 빛과 소리가 거대할수록, 후자의 풍경은 잊히기 마련입니다. 눈앞의 풍경이 화려할수록, 우리는 그 풍경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죠. 그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낸, 기원으로서의 일상이 얼마나 척박한지도 그리고 불안정한 채로 여전하기만 한지도 망각하고선 말이죠.

지난 수개월 동안 우리는 광장에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텔레비전과 수많은 언론들이 그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그 풍경을 다시 뿌듯하게 감상했죠. 그런데 나는 가족들과 함께 광장에 서 있는 내내 마음 한쪽이 불편했습니다. 정권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거치고 나면 결국 나의 내면은 나의 죄와, 나의 비겁함과 피할 수 없는 조우를 해야 했고, 그리고 곧장 압도적인 군중의 외침들, 열망들에 그것들은 불편하게 표백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광장을 메운 화려하고 압도적인 풍경과 대비되던, 여전히 하찮고 헤어날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의 풍경 때문은 아닐까요? 핍진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항구성과 눈앞에서 펼쳐지던, 한순간의 거대한 폭발과 같았던 광장의 화려한 풍경과의 극명한 대비.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내가 그 풍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며 느끼던 감정. 나를, 우리를 풍경화해서 보여주는 매스 미디어. 나는 군중으로 가득 찬 광장에 서 있으면서 그들에 쉬이 동화되지 못하고 그들 한 명 한 명의 지친 일상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일상의 모든 것을 동화시키는 의미의 도가니.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름이든, 정의의 이름이든 나는 모든 일상을 무화시키는 의미로 들끓는 그 상황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대선날 내가 본 그 택배 기사 부부의 풍경은 마치 광장에서 내가 본 풍경들의 대비가 여전히 지리멸렬하게 연장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도시는 소음과 빛을 먹고 토하며 살아가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 소음과 빛에 시달리며 살아내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소음으로 가득 찬, 쳐다볼 수 없는 빛일 뿐입니다. 그 희망의 몸피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것은 때론 압사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희망의, 희망이 품고 있는 의미치들의 폭력들. 결국 내가 매달리고 있는 희망이, 희망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때가 있습니다. 대개 그 희망들은 화려하고 거대하며 응당 진리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희망이란 조금은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이제 작디작아져야 할 것입니다. 마치 다양한 색깔들로 이루어진 조각보처럼 우리 각자의 일상 속 작은 희망들이 각자의 빛깔들로 희망의 조각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각자의 작은 일상의 빛깔들로 얼기설기 이어진 조화. 그리고 조화로운 희망이란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가다머는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방식”(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이라고 말합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이해의 영토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셈이죠.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생활과 그 생활로부터 연원(淵遠)한 희망의 빛깔들을 이해하는 힘. 그 이해를 바탕으로 조화를 만들어내는 힘. 이해는 “유한한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내가 타자를 이해할 때, 타자 또한 나를 이해할 터이니까요. 이때 이해는 존재증거가 되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정치라는 풍경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일상, 이들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작은 풍경의 빛깔이고, 그 빛깔이 어떤 거대한 담론이나 사상보다 중요할 터입니다. 거대한 풍경의 기원으로서의 일상. 그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우리 각자의 일상과 희망을 이해하는 것. 작은 희망과 작은 이해들, 어쩌면 지난 거대한 정치의 시절 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

대통령 선거는 끝났고, 이제 정치가 건네준 광장의 거대한 풍경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 테죠. 이제 텔레비전에서는 새로운 정부의 개혁과 통합을 이야기하지만, 그 부부는 이제 조금은 더 일찍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가족이 함께 앉아 저녁을 나누는 풍경을 만들고 있을까요?

  • 김안 시인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가 있다. 제5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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