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자 인터뷰
창작준비금, 예술인에게 힘이 되다
2017. 7
다독여지는 그런 음반이 되길 바랍니다 2016년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자 가수 기현수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광주문화재단 사업을 신청할 때 알게 됐던 것 같다. 재단 홈페이지를 보던 중 창작준비금 사업이 눈에 가장 띄었다. 예술활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해당 사항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창작준비금 사업에 지원하게 됐다.
창작준비금에 대한 생각개인적으로 300만 원이라는 돈은 정말 큰 금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에 따라 엄청 많은 돈일 수도 적은 돈일 수도, 있겠지만 300만 원은 내가 많은 공연과 강습 등을 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기에 엄청 힘들다. 따라서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종잣돈이 되어서 음악인으로서 결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더 많이 주면 좋겠지만 말이다.(웃음)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 소감우선 창작이 활성화됐다. 자부심이 생긴 것 같다. 재단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후원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2012년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진행됐던 〈신나는 예술여행〉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14곳의 교도소 순회공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교도소 직원들이 힘들어도 자부심을 느끼며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리 말단 직원이라도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나 또한 재단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갖춰서 예술활동증명을 받았고, 뭔가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라 자부심이 든다.
창작준비금 사업의 아쉬운 점컴퓨터를 잘 못 다뤄서 힘들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못하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 정도의 수고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뭐가 있겠나? 다른 곳에 비하면 엄청 간단한 편이다. 서류도 적은 편이다. 창작준비금을 신청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다. 2013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문체부 사업(신나는 예술여행, 복권기금)에 신청했는데, 계속 떨어지더라. 며칠 밤을 고민하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면서 준비하는데, 막상 떨어지고 나면 정말 허무하다. 재단은 이런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싶은 말예술의 필수는 가난과 고독이라 하더라.(웃음) 음악을 하려면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가난을 무릅쓰고 하겠다는 각오가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부자로 사는 것도 좋겠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업하면서 힘들 때도 ‘나만 힘들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보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봤으면 한다.
최종 목표내 소원은 풀 오케스트라와 함께 음반 작업을 하고, 공연을 해보는 거다. 반드시 이룰 것이고,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뿌리가 되어서 어떻게 자라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2016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자 옻칠공예 작가 박만순
2014년도에 공예 쪽으로 검색하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재단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어가 정보를 찾게 됐다. 창작준비금은 사실 첫해에는 전혀 몰랐다. 두 번째 해인가 들어가 보니 홍보가 많이 되어있더라. 그래서 알게 되었고, 신청하게 됐다.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에 대한 주변 반응사실 장인들은 정보를 잘 모른다. 자기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물론 나 또한 잘 모른다. 그런 부분들은 아내가 메꿔준다. 창작준비금을 알게 된 계기도 아내 덕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예술인을 위한 복지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창작준비금을 받아서가 아니라, 요즘 주변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예술인들을 위한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주변에서는 우리가 창작준비금으로 초충도함을 만들어서 경기도에서 대상 받은 것을 거의 다 안다.(웃음) 특히 예술인에게는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사실 우리도 건강보험료 4,000원 때문에 겨우 됐다. 4,000원 차이가 이렇구나 싶더라.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 소감생색내는 것이 아니라,(웃음) 정말 순수하게 재료비로만 사용했다. 옻칠공예는 재료비만 확보된다면 뭐든 다양하게 시도를 해볼 수 있다. 그리고 때마침 사임당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말이 있었고, 방영에 대비해서 초충도함을 만들기로 했다. 그걸 경기도 공예품 경진대회에 출품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창작지원금이 경기도에서 대상을 받고 전국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300만 원으로 칠도 사고 기타 재료를 샀다. 준비된 재료와 만든 것을 보면 든든하고 뿌듯하다. 더구나 만든 작품들을 여성중앙에서 취재했고,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 블로그에 인테리어 팁으로 소개도 되었다. 흔히 사람들은 나를 옻칠장이라고 부른다. 보통 재료인 색 옻칠 1kg이 35만 원 정도이다. 그럼 300만 원으로 몇 개나 살 수 있겠는가.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의 노하우를 통해 색을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만 원짜리 주합칠 2통과 색 안료 몇 개만 있으면 다양한 색칠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창작준비금 지원을 받아 이러한 재료를 사서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었다.
최종 목표단기적으로 지금 바라는 것은 창작준비금을 통해 만든 여러 가지 작품들이 잘 팔려서 그게 확대 재생산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고려시대 나전칠기가 20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1점 밖에 없다. 2006년도에 '천년을 이어온 나전칠기' 전시회가 있었다. 그때 해외에 있었던 나전칠기까지 함께 전시회를 했는데 끝나고 나서 다시 해외로 갔다. 우리는 나전칠기를 보려면 해외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나의 최종 목표는 그 나전칠기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지금 내 세대가 옻칠공예 장인의 마지막 세대이다. 내 세대의 사람들과 함께 고려시대 나전칠기를 재현해보고 싶다. 그래서 창작준비금을 단순 일회성으로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뿌리가 되어서 어떻게 자라는지를 꼭 보여주고 싶다.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 적금식이라 생각한다.(웃음) 그리고 그것이 판매되면 실질적으로 공예인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4년도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 2010년 하반기에 돌아와 한국의 문화예술 사정을 잘 몰랐을 때, 학교 선배를 통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엔 재단 설립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에 놀랐었다. 재단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선 먼저 예술활동증명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떨어진 사람도 매우 많더라. 그 후 재단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원 사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을 모르고 있는 주변에 알려 주었다.
창작준비금에 대한 생각사업 신청은 이번이 두 번째로, 2015년에 한 번 떨어졌었다. 재단에서 요구하는 심사 범위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창작준비금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모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차와 심사가 꽤 까다로운 듯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재단에서 그런 부분을 조금이나마 보장하여 주는 듯 보였다. 작년에 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 검색할 수 있는 시간이 많더라. 순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생각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작준비금을 보았는데 마침 접수 마지막 날이었다. 다행히도 사전에 준비해 놓은 서류들이 있어서 쉽게 접수할 수 있었다.
창작준비금 사업의 아쉬운 점나는 컴퓨터 사용에 불편함이 별로 없었지만 모든 서류를 인터넷으로 접수해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다는 편견 때문에 시작도 안 하고 그냥 포기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다. 인터넷을 잘 다루지 못하는 세대에게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분들에게도 알려 줄 의무가 있고 부족한 부분은 도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 소감그냥 단순히 시기가 맞아서 창작준비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부터 오스트리아와의 초대 전시계획이 있었는데 창작준비금이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빠듯하게 전시했을 것이다. 2016년 사고로 다리도 불편했던 상황이라 더욱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작품을 먼저 택배로 보내고, 도록도 만들고, 전시 중 필요한 비용 등을 지원금으로 충당했다. 덕분에 별다른 걱정이 없이 오스트리아에서 전시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전시 기간에 시청 앞과 주변에 태극기가 달렸는데 펄럭이는 모습을 보며 왠지 뭉클하기도,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었다. 한국의 도예를 조금이나마 알리고 고객과 소통을 하여 깨달음이 있는 전시성과도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전시 후 성북동에서 함께 전시했던 분들과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판매전을 하기도 했다.
최종 목표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것.(웃음) 우리나라에서 예술 분야의 스타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다. 예를 들면 지금은 고인이신 ‘앙드레김’ 하면 ‘화이트’가 떠오르듯이 도예가 이혜란 하면 떠오르게 되는 어떤 것, 고양이. 내가 돋보이게 되는 것보다 내가 작업하고 있는 상징적인 것이 떠오르는 것이 목표이다. 물론 고양이 작업을 하며 다른 분야의 것도 병행하게 되겠지만, 현재는 내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과 미래에 바뀌게 되는 관심 분야에 따라 작업은 자연스레 그 색깔이 변화할 수 있으니 나만의 고집을 가지고 올해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