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과 한계가 번갈아 만들어 온 것들
2017. 6올해 9회를 맞는 아트북페어 UE(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기획자이자 다양한 독립출판물 라인업으로 주목받는 독립서점 유어마인드 공동대표, 개성 있는 굿즈와 서적을 제작·출판하는 편집자이자 제작자, 무엇보다 글을 쓰는 작가… 이로 씨를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많다. 각각의 정체성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공조하며 그의 여러 작업에 비교적 선명한 색을 입혀왔다. 매 순간의 고민과 선택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그렇다는 이로 씨. 최근 연희동으로 옮긴 유어마인드에서 그를 만났다. 글·사진 김지승
공간은 독립서점 운영자들의 공통된 딜레마다. 대부분 가능한 최대치의 공간으로 시작하지만 운영에 있어 현실적 한계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어떤 경계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에서 운영자나 손님 모두 불필요한 부담을 느끼기 쉽다. 새 공간에서도 관련 고민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이로 씨는, 그래도 전과 달리 설정이나 인테리어 계획이 미리 있었던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서점 운영에서부터 기획하고 작업하는 일들, 여러 예술가들와의 협업 경험,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참여 소감까지 이어졌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좋은 이상함’을 꼽은 인터뷰를 본 적 있다.선택 기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듣는데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서 고르게 된 표현이다. 실제로는 어떤 책을 선정하지 않는 기준에 더 가깝지 않나 한다. 책을 제작하기도 해서 받은 영향일 거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자기만의 시선이 부족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출판방식은 배제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대형 출판시장에 잘 없는 책들이 자연스럽게 모인다. 기준 자체가 아주 명확하다기보다 모아보니 그렇더라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사후적인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
독립서점이 많이 생겼는데, 판매 서적 선정의 차별성은 약하다는 의견이 많다.우선, 공간의 한계가 있겠고 국내 독립출판물의 양이 차별성을 두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판매량을 감안해 주목받는 책들을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 책들로 개성을 드러내야 할 텐데 선택의 폭이 좁다보니 라인업이 유사해진다. 운영자의 성향을 충분히 반영할 수 없는 거다. 국내 출판물 라인업에 대해서는 늘 고민이다. 유어마인드의 경우 해외 서적 수입, 자체 제작하는 출판물과 굿즈, 토크 행사나 그 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다. 차별성이 중요하긴 해도 차별성만을 내세운 배타적 라인업과 제작은 지양하려 한다.
서점 운영 외에도 기획, 제작, 편집, 저자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역할이 제일 어려운가?단연코 서점 운영이다. 365일 실재하는 공간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고, 최대한 틈 없이 운영하려고 해도 끝끝내 보완되지 않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서점을 운영하기에 최적화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산발적으로 하는데, 내 멘탈에는 도움이 되지만 서점을 튼튼하게 운영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일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해 생기는 단점들이 분명히 있다.
반면, 작가-출판사-서점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유리한 측면도 있지 않나?출간 예정인 『돈가스 만필집(가제)』을 출판사와 상의해서 개인출판 버전으로 미리 200권을 만들어봤다. 본책이 나오기 전에 완성된 원고만으로 조그맣게 독립출판을 해본 거다. 그런 면에서 좋은 환경에 있긴 하다. 스스로 출판할 수 있고, 유어마인드에서만 팔 수도 있고, 다른 출판사와 협력해서 더 두꺼운 책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작가 겸, 출판사 겸, 서점이라는 것을 그런 경우 유독 더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줄기를 다 같이 활용해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 많은 독립예술가들과 교류하고 협업한 것으로 안다. 그들이 주로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면?언제나 한 가지로 수렴되는 것 같다. 그들을 폭넓게 이해해주는 사람은 여러 면에서 여유가 없고, 충분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어긋남이 상당히 고질적이다. 클라이언트든, 협업하는 회사든, 개인이든 규모가 크고 안정적이고 예술가에게 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곳은 예술가의 성향과 개성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작업 연장선상에서 예술가가 끝까지 가져가고 싶은 작업이 잘 안 나오는 편이다. 반면, 우리처럼 규모가 작은 곳들은 예술가들과 긴밀하게 상의하고 배려하고 그들의 개성과 큰 충돌 없이 어떻게든 그 부분을 살려보려 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또 안 되는 거다. 이런 불일치 상황에서 자기를 어떻게 컨트롤하는지가 예술가들에게는 큰 숙제이고 스트레스인 것 같다. 나도 늘 느끼는 부분이다.
예술가의 삶 지원하는 복지성장 가능성에 기여하는 의미도 그런 불일치는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의 어려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혹시 재단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나?
2015년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의 참여기업이었다. 두 예술가가 유어마인드에 와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비슷한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해보고 싶은 작업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까지 외부 기획에 따라 일을 진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파견 예술가들의 기획과 작업이 공간 활용에 있어서 좋은 소스가 되었다. 프로젝트에 따른 방문자들의 규모나 성격, 반응 정도 등을 체크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SF를 콘셉트로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이의 값’이라는 아트워크 교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자신의 평면 작업물과 다른 아티스트의 작업물을 교환해 가는 방식이었는데 설정이나 교환 과정이 재미있었다.
참여 후 아쉬운 점이나 사업에서 보완했으면 하는 점은?한 가지 생각이 두 방향으로 들었다. 소규모 사업체의 경우는 뭔가 더 공격적으로 시도해보고 싶어도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가령, 영업시간을 할애해 프로젝트를 진행하자고 할 수가 없다.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다. 그래서 기업이나 단체에도 일정 정도 지원을 한다면 그런 제약 없이 조금 더 재미있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한쪽 방향으로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재단에서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프로젝트가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겠다는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들었다. 지원금을 프로젝트 운영에만 투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또 남지 않나. 추가적 지원이 필요한 곳이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예술가 당사자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 같다.
예술인 복지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이 있다면?약 3년 전부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사업에 관한 이야기, 사업에 신청했다거나 참여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다양한 사업들의 취지에 공감하는 면이 있었다. 주로 작품에 대해 지원하는 문화재단과 예술가의 활동이나 기본적인 삶을 지원하는 복지재단이 각각 다른 지원 영역을 갖고 있는 게 좋고 균형 잡힌 복지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동떨어져 있진 않지만 작품으로 지원 받을 사람은 작품으로 받고, 일상을 지원 받고 싶은 사람이나 둘 다 받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이 생긴 것 같다. 예술가는 개별 작품에만 지원해주는 한 가지 방향으로 갈 때보다 조금 더 가능성이 생기는 거다. 기본적인 생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훨씬 더 좋은 작업을 하거나 그 성장 폭이 큰 예술가가 분명히 있고, 재단 지원은 그 가능성에 대한 큰 기여일 수 있다.
재단 사업 지원에 필요한 서류 제출에 거부감을 느끼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 관련해 가까이 경험하거나 느낀 바가 있는지?예술가 마음이 이해가 된다. 복지재단뿐 아니라 여러 재단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예술가 입장에서는 가장 비문서적인 것을 문서적으로 증명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괴리가 클 수밖에 없다. 예술가의 작업 대부분이 비문서적인 활동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고, 어떻게 보면 그걸 문서화하기 좋은 사람이 지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작업은 활발히 하지만 유독 문서화는 잘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느낄 거다. 그들이 가지는 불만이나 어려움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적인 지원에 있어서는 문서화된 요구나 시스템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현재까진 그 외의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최소화, 간소화는 요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애와 자의식 과잉정도와 방향 파악이 작품에 영향 올해로 UE가 9회를 맞는다. 올해 주된 변화가 있다면?
주된 변화는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거다.(웃음) 보통 3, 4월이면 장소와 여타 많은 게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올해는 서점 이사가 겹치면서 시간을 내기 힘든 측면이 좀 있었다. 일정과 공간을 우선 결정하고 나서야 구체적인 기획이 나올 거다. 5월 말쯤이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180팀이 참여한 작년, 신청한 팀은 580팀이었다. 400팀이 떨어졌다. 제작자들이 떨어진 팀으로 UE를 두 번 더 할 수 있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공간 규모의 한계에 부딪힌 셈이다. 기획자 입장에서도 신청한 팀과 선정된 팀의 비율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 200팀 이상이 참가할 수 있는 공간을 알아보는 중이다.
UE 참여팀은 어떤 방식으로 선정되나?신청한 팀의 포트폴리오를 온라인에 모두 올려놓고 기획자들이 사전 의견 교환 없이 각자가 투표를 한 후 득표 순위에 따라 상위권부터 추리는 방식이다. 자칫 한두 사람이 라인업을 주도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 사전 의견 교환이나 토론 없이 진행한다. 멤버들 각자의 시각을 믿는 편이다. 결과를 보면 기준점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이 팀이 어떤 활동을 해왔나, 얼마나 활발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고, 다른 누군가는 UE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계획해서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가를 위주로 본다. 둘 다 필요한 기준점이다. 그렇더라도 객관적 지표라고는 할 수 없어서 탈락팀들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더 나은 방식을 찾기 전까지 어느 정도 암묵적인 양해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직업적인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있다면?적어도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신(scene) 내에서 이상적인 예술가의 덕목이라면, ‘자의식이 어느 정도 과잉되어 있지만 자기가 정확하게 얼마나 과잉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한국의 문화 토양이 말도 안 되게 척박하거나 굉장히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매한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고 보는데, 오히려 예술가들에게는 더 힘들 수 있다. 아예 척박하면 놔버릴 수 있고, 풍요로우면 성장할 기회가 많지 않겠나. 언어로서도 갇혀 있고 규모면에서도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에게는 여러 갈등 상황을 만든다. 어느 정도의 자기애나 자의식 과잉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을 자양분 삼아 발전하거나 어쨌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과잉만 되어 있는 경우 작업으로 자신이나 타인을 괴롭히는 걸 너무 많이 봤다.
제8회 UE 포스터, 이로 대표의 저서들자신이 어느 정도 과잉되어 있는지 관찰자 시점으로 볼 수 있다면 역으로 그걸 이용해 재미있는 작업을 좀 더 공격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내게도 더 있었으면 하는 덕목이다. 스스로에게 갖는 엄격함, 자기 객관화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엄격함이 자의식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좌표 체크하듯 어느 정도인지만 인식하고 작업에 적용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자기비판으로 향하거나 사람들이 말하는 상식적 적정선에 맞추는 객관화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자기가 지금 어디로 튀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나 새로 구상 중인 기획이 있다면?일단 매년 하고 있는 일을 무리 없이 해나가고 싶다. 서점, 출판사, UE 운영 이 세 가지 큰 덩어리를 끌고 나가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그런데 성향이랄까, 한 해 계획이 잡혀 있다고 해서 거기에만 몰두하는 건 또 못 견뎌하는 면이 있다. 늘 다른 것들을 새로 만들어내는 시도를 하려 한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힌 건 없지만 평상시처럼 운영할 일들 외에 새 공간을 계기로 여러 가지를 시도해볼 수밖에 없을 거다. 서교동에 있을 때 진행했던 토크 중 아쉬움이 남는 몇몇을 하반기부터 강연이나 토크 시리즈로 구성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또, 오디오 클립 서비스 진행을 맡게 되어서 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준비 중이다. 개인 작업으로 올해 안에 완성해야 하는 『돈가스 만필집(가제)』 집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