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예술인 복지를 논하다
2017. 4“가난한 예술가의 삶”,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의 경제적 삶을 규정짓는 정형화된 이미지(stereotype)이다.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예술적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마감했다는 뉴스는 각종 신문과 인터넷에 넘쳐난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예술인의 처우 개선에 대한 요구와 국가적인 대응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예술인 복지법』이 2012년 11월 시행되기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인의 직업안정, 사회보장 확대, 예술인을 위한 특화된 복지 지원 프로그램의 개발과 실행을 위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설립된다. 바야흐로 예술인 복지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예술인 복지와 관련한 일련의 과정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예술가들에게 과연 사전적 의미인 ‘행복한 삶’을 뜻하는 ‘복지(祉福)’는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예술가들은 예술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린다. 예술창작 행위가 바로 복지인 것이다. 예술인 사회 안전망은 안정된 예술창작기반이 구축되어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야말로 안정적인 예술 활동이 안정적인 일자리이자 최고의 복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특히, 서울에 비해 창작기반이 열악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예술인 복지 수혜 절차의 복잡성, 예술활동증명에 대한 인식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술인 복지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복지정책 실행에 앞서 예술인을 확인하는 ‘예술활동증명'이 필요하다. 문제는 여전히 활동증명 조건을 채우지 못해 예술활동증명조차 받지 못하는 예술인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예술활동증명을 위해서는 ’예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정적 등록 절차 행위‘를 해야 하며, 실제로는 정보 부족으로 인해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 예술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인 “Catch 22”*에 빠져 있다.
부산 문화의 특징은 개방성, 저항성, 실험성으로 요약된다. 이런 특징은 예술인들의 기질로 투영되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예술인 복지에 대한 열의와 처우 개선을 위한 실험과 저항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 행정에서도 지역 예술인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부산시는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고, 예술인 복지 증진을 위해 2013년 10월 「부산광역시 예술인복지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다. 이 조례는 ‘예술인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해마다 예술인복지증진계획(이하 “증진계획”이라 한다)을 수립·시행’하여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조례의 본격적인 시행으로 지역 예술인들의 복지 수요가 증가하였지만, 문제는 지역 예술인 생활 실태와 창작 여건 등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가 미흡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부산시는 부산지역 예술인들의 활동 여건과 생활실태 등을 파악하여 부산 문화예술 진흥과 예술인 복지정책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또한, 지역 실정에 맞는 부산형 예술인복지증진계획 수립을 위한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예술인 복지 정책 과제 발굴을 위해 〈부산예술인 실태조사 및 예술인복지정책수립 보고서(2015. 9)〉를 발간한다. 필자 역시 본 연구에 자문위원으로 몇 차례 참석하였는데, 지역 단위에서 최초로 수립하는 종합적인 예술인 복지 정책에 대한 기대와 전국적 관심이 쏟아졌다. 이 보고서는 전국 최초의 의미보다 부산시, 부산문화재단, 예총, 민예총, 예술인이 함께 정책을 만들었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한편, 부산문화재단은 부산시와 정책적 연계를 통해 예술인 복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을 전개한다. 부산문화재단의 예술인 복지사업은 우선적으로 예술인 복지 “Catch 22”를 해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데, 2016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예술활동증명 등록 대행 서비스’를 시작한다. 당장 종합적인 예술인 복지 사업을 펼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가장 신속히 해결해야 할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 지원을 받으려면 예술활동증명 등록을 해야 하나 정보 부족과 까다로운 절차 탓에 수혜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등록 대행 서비스는 지역 내 예술인 복지의 디딤돌로 시작한 일이다. 예술인들을 직접 찾아가서 등록에 관한 컨설팅, 예술인 조건 충족을 위한 자료 등록 대행 서비스는 특히 만족도가 높았다. 부산문화재단이 ‘예술활동증명 등록 대행 서비스’ 사업을 시행한 결과, 부산의 예술활동증명 완료자 수는 2016년 12월 기준 2,059명으로, 전년(658명) 대비 212.9%라는 큰 폭의 증가율로 나타났다.
부산예술인복지지원센터 개소식부산문화재단은 올해 ‘부산예술인복지지원센터’의 개소와 함께 부산발(發) ‘예술인 복지’의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한다. 전국 최초로 예술인 복지사업 추진을 위한 거점 공간화와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사업 홍보와 매개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과 지역 간 예술인 복지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예정이다. 부산예술인복지지원센터는 올해 예산 4억 원을 확보하고, 예술활동증명 대행 업무 외에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주요사업으로 예술인 복지 코디네이터 운영, 예술인 일자리 박람회 개최, 반딧불이(빈집 활용) 사업, 휴-안심 프로그램 운영이 있다. 올해 특히 주력하는 사업은 '예술인 일자리 박람회'와 '예술인 일자리 파견'이다. 부산문화재단은 오는 4월, 자체적으로 예술인 일자리 박람회를 개최 예정인데, 이를 통해 예술가의 재능이 필요한 기업과 안정된 일이 필요한 예술인을 연결해주는 장을 마련한다. 예술인 복지의 기본은 안정된 창작기반과 함께 그들의 창의력을 안정된 직장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지역 내에서도 문화예술과 경영을 접목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어 고무적이다. 부산, 울산, 경남 기업을 참여시켜 예술인 일자리 박람회를 열고 예술인 일자리 파견으로 연결할 계획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의 예술인에게 창작공간을 지원하고, 심리 안정과 법률 분야의 상담도 제공할 예정이다. ‘반딧불이 창작공간 사업’은 빈집이나 폐·공가를 고쳐 예술인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현재 부산문화재단이 소재한 부산시 남구 감만동을 중심으로 빈집 등 공간을 기부받고 있다. ‘휴-안심 프로그램’은 감정 소요가 많은 예술인을 위한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고, 계약 등에 조언해주는 법률 상담도 제공할 것이다.
부산의 예술인 복지 사례는 한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지역에서 예술인 복지를 논할 때 ‘선순환 예술 창작 생태계 조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인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문화예술 종사자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창작자가 존중받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이러한 예술 창작 생태계를 바탕으로 향후 체계적인 저소득·고위험 예술인에 대한 복지 강화,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 보호를 위한 제도개선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편집자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절대적 위력을 행사하는 함정으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조지프 헬러(Joseph Heller)의 소설 『캐치 22(catch 22)』에서 유래한 신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