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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시인 김안

괄호의 삶

2017. 3
괄호의 삶 이미지

얼마 전 본 기사에 흥미로운 통계 결과가 나왔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종교가 없는 국민이 무려 56.1%라는 것. 이처럼 종교가 없는 국민이 종교를 갖고 있는 국민을 앞선 것은 산업화 이후 최초라는 게 그 골자였습니다. 기사를 본 후 이 나라에서는 신마저도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버린 것일까, 라는 감상적인 생각 따위를 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께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올해, 68세이신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종교가 없습니다. 한때는 지인들이나 친척에 이끌려 교회나 절을 잠깐씩 나가신 적이 있었지만 몇 주 후면 으레 다시 신도 종교도 없는 자리로, 그 가난한 가정(家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교회든 절이든 똑같이 ‘돈’이라는 신을 섬긴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리고 비로소 온전히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았다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과 신을 섬긴다는 이들이 기거하는 그 성채에 ‘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건강과 평화를 구하기 위해서도, 그 구함의 정도를 더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잠시나마 목회자를 꿈꾸었던 당신의 외동아들은, ‘사람을 보지 말고 신을 보세요’라고 간혹 이야기하곤 했지만, 신이 기거한다는 그 장소들에 신은 없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욕망만 득시글득시글하다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 외골수적 고집을 그대로 닮은 외동아들은 이제는 신 대신 문학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고요.

그에 반해 올해 76세이신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이후, 무기력하고 곤고한 일상을 지속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매주 주일마다 꼬박꼬박 성당에 나가고 계십니다. 인생의 황혼기에서야 지친 살과 뼈를 이끌고 신을 찾으신 거죠. 그것은 당신 역시 당대 젊은 시절 대부분의 육체노동자들처럼 남들이 쉬는 날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었기 때문일 테죠. 당신에게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아마도 사치였을 것이고, 아니 어쩌면 일을 할 수 있는 하루를 온전히 신을 위해 봉헌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을 테지요. 애초에 그것은 신과 가난한 가정이라는 양자 사이의 선택이란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의 경우를 생각하니 가난은 그 정도에 따라 사람들에게 몇 가지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집착(실은 그것이 영영 불가능함에도)의 길이고, 둘째는 그 현실로부터 영영 눈을 돌리는 길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현실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의 뜻 깊은 의지나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는 전생에 두는 것이고, 둘째는 현생의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생활고로 인하여 동반자살을 택하는 가족에 대한 기사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앞서 언급한 56.1%에 그 원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물론 이는 무책임한 진단이겠지요). 아버지의 그 숭고한 집착은 당신이 겪어온 우리 사회의 경제적 위기 속에서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 좌절의 경험 속에서 당신의 살과 뼈는 늙고 가늘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집착이 떠나간 자리에 비로소 신이 들어왔습니다. 매주 성당을 찾아 그 곤고했던 삶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확들―당신의 외동아들과 며느리와 손녀―에 감사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익히신 셈이지요. 유독 길고 거칠었던 사춘기 시절의 외동아들이 보았던 아버지의 무기력함들.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의 시선이 그렇듯 저 역시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질 만큼 섬세하지 못했던 것은 늘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집착이 떠나간 후의 무기력함을 원망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채 그것을 내면화했던 그 외동아들은 자연스레 현실 대신 문학적 삶을 살고자 하고요.

언어적 관습은 곧 그 해당 사회와 시대의 정신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종교를 가진다’고 말하곤 합니다. ‘가진다’라는 소유의식 속에 종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종교는 ‘나’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적 관습 속에서 종교의 자리는 ‘나’보다 아래에 존재하는 셈입니다. 종교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의하여 내가 소유하는 것이죠. 우리네 종교가 현세구복적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이러한 언어적 관습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유명 종교인이나 대형 종교단체들을 통하여 또한 확인하곤 합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어머니와 종교를 ‘가지게 된’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하며 그 ‘종교’의 자리에 ‘문학’을 슬그머니 놓고서 어정쩡하게 살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문학은 그리고 예술은, ‘문학을 한다, 예술을 한다’라는 말에서 보듯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삶, 예술을 하는 삶은 그러합니다. 그것은 종교처럼 선택받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응시하며 삶과 함께, 하나의 삶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섬김’(종교)과 ‘공경’(부모) 또한 함께‘하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개인적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제대로 함께‘하기’위해서는 나와 문학(예술) 사이의 균형을 불안스레 맞춰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문학이나 예술은 조금만 눈길을 돌리게 되면, 우리네 종교가 그러하듯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하며 어리석게 지배하려 듭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일견 종교와도 닮은 탓에 우리네 삶 속에 끊임없이 개입하려고 합니다. 그 개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문제는 그 개입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가 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네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고, 욕망을 좌절시킵니다. 온전한 종교가 인간의 욕망을 신의 속성으로 조형해내려는 것과 달리, 그것들은 욕망의 발산으로 나아갑니다. 문학과 예술가들의 기록들에서 보듯, 한때 그것은 자연스레 용인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욕망에 자신을 내던져 욕망과 함께 사라진 이들을 때론 롤모델처럼 여기기도 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각 시대적 윤리들이 수용할 수 있었던 틀 안에 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수용할 수 있는 윤리 속에서 그 개입들을 윤리적 개입으로 탄력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불편한 윤리와 함께 잔존하기입니다. 겸손하되 자신을 증오하지 말고, 자신감이 있되 자신의 결과물이 최고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삶은 일시적인 삶이 아니라, 시간성을 요하는 삶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불타올라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이 무차별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최대한 영원히 잔존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문학과 예술이 시간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네 욕망을 온전히 조형해내는 삶입니다.

문학, 예술, 심지어 종교든 간에 자본의 운동성 안에 움직이는 현 시대를 온전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기어이, 연명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무지하고 광폭한 본문이 아닌 괄호가 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존 버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차라리 괄호 같은, 그것이 없었다면 역사는 무자비한 흐름이 되고 마는 괄호와 같은 어떤 것이다. 이런 괄호가 모두 모이면 그것이 바로 영원이다.”
괄호가 되는 삶. 그것이 종교의 삶이고, 문학과 예술의 삶입니다.

  • 김안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가 있다. 제5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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