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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8 2018. 12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집중 기획 예술을 향유하는 예술인

까다롭고 열정적인 감상자들

2018. 10

시인 릴케와 로댕의 관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장르의 작품과 예술인이 모자란 1%의 영감을 채워주기도 한다. 예술적 인연은 사람으로만 닿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우연히 흘려들은 음악이, 어느 순간 앞에 섰던 그림이, 무심코 집어 든 책이 마치 그런 역할을 위해 오래 기다려왔다는 듯 다가올 것이다. 그런 우연과 애호의 순간을 이야기해달라는 〈예술인〉의 요청에 예술인들이 인상적인 답을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예술인들은 각 장르에서 10년 이상 활발히 활동해온 이들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애호를 밝혔다.

특유의 리듬과 색이 있는 자기 세계를 가진 예술인들이지만 애정하는 장르나 작품, 작가가 간혹 겹쳤다. 30대의 시인과 50대의 시인이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40대의 연극배우와 음악가가 반복해서 읽는다는 소설이 같았다. 그중에서 유독 중복 언급된 아티스트와 작품을 여기에 소개한다. 어떤 위계나 목적은 없다. 좋아하고 동경하고 위안을 얻었거나 얻고 있는 작품과 아티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예술인들이 무척 신나 있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시인이 추천하는 음악: MOT
  • MOT MOT 1집
“첫 앨범을 자꾸 얘기하는 건 꾸준히 앨범을 내고 있는 뮤지션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MOT의 1집 〈비선형〉처럼 단단한 어둠의 쨍함을 가진 음악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1집, 데뷔 앨범만이 가진 그 느낌도 너무 좋았다. 우울이 언제나 현재형인 것처럼 〈비선형〉의 감정은 언제 들어도 늘 현재형이다. 슬픈데 좋다. 우울한데 미칠 듯이 좋다.”

2004년 여름 초입에 발매한 1집 비선형(Non-Linear)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 한국 100대 명반에 이름을 올린 MOT. 그렇다고 시끄럽고 화려한 데뷔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보다는 더 회자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쪽에 가까웠다. 새로운 밴드의 등장은 지금껏 거기 있는 줄 몰랐던 감정을 환기시켰다. 그게 비애라고 해도 좋고, 정교한 슬픔이라고 해도 좋았다. 보컬 이언(현재는 이이언)과 지이(Z.EE)로 이루어진 2인조 밴드 MOT이 환기한 그 감정들은 지금도 가끔 시(詩)로 번역되고 있다.

2007년 2집 〈이상한 계절〉 이후 이이언은 솔로 앨범 활동을 하기도 했다. 8년 만에 5인조 밴드로 정규앨범 〈재의 기술〉을 내놓은 MOT은 이제 8년쯤은 우습게 기다릴 수 있는 밴드가 되었다. 기다림의 끝이 믿음직스러운 슬픔이어서.

뮤지션이 추천하는 화가: 문우식
  • 문우식의 소녀 있는 공방, 엉뎅이를 자랑하는 말 문우식의 〈소녀 있는 공방〉, 〈엉뎅이를 자랑하는 말〉
“문우식 화백의 작품이 주는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는데, 특히 〈엉뎅이를 자랑하는 말〉과 〈소녀 있는 공방〉이 남달라서 처음부터 시선을 끌었다. 어떤 그림은 앨범 재킷으로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로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개성을 살리고 있다. 만들고 싶은 음악 같달까. 아니, 이야기 같다고 할까.”

문우식(1932~2010) 화백은 한국전쟁 전까지 남관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고, 1952년 부산 피란 때 홍익대 미술학부에서 이종우와 김환기 화백의 지도를 받았다. 〈소녀 있는 공방〉 속 소녀의 주인공이기도 한 미술학도 조정순 씨와 결혼한 그는 자신만의 철저한 조형언어 안에서 전통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둘째 딸 문소연 씨가 2009년부터 찾아다니며 조사하고 모은 문 화백의 작품과 자료들이 올봄 회고전에서 선보이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동시대적 작품과 변별되면서도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1950년대에 『4인전』(1956)과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전』(1957), 조선일보 주최 제1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1957)과 『신상회 창립전』(1962) 등에 참여하고 출품하면서 문 화백은 앞선 행보를 보였다. 근경의 건물을 평면화한 화풍이나 비전통적인 표현과 색채의 모색, 또 스토리텔링이 구사된 그래픽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그의 개성은 여러 분야에 영감을 주기 충분하다.

시각예술 아티스트가 추천하는 건축가: 김중업
  •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
“명보극장, 서강대 본관, 주한프랑스 대사관… 날이 좋으면 괜히 그렇게 한 바퀴 돌며 김중업이 디자인한 건축물을 보고 온다. 안양에 있는 김중업 박물관도 종종 간다. 거기서 처음 김중업이 피카소 그림 습작을 한 스케치북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굉장히 정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건축물에 낸 창이 유독 참 좋다.”

김중업(1922~1988)은 한국 건축가 1세대로, 약 40년간 활동하며 200여 개의 프로젝트와 작품을 진행했다. 1941년 요코하마 공업고교 건축과 졸업 후 3년간 마쓰다 히라다 건축가사무소에서 실무를 배웠다. 이후 크게 프랑스 대사관 등 한국 활동기, 해외 추방으로 인한 공백기, 귀국 후 활동기로 나눌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건축물의 변화가 커서 그의 생각과 적용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의 경향을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1952년 7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면서 르코르뷔지에와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만남은, 더구나 세계적인 예술인과의 만남은 운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3년 6개월 동안 르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수학한 후 돌아온 그는 자신만의 건축소를 열고 다양한 건축 작업을 시작한다. 서 산부인과 병원 건물, 서강대 본관, 이탈리아 대사관(이경호 주택), 욱일 빌딩 등 그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들이 차례로 땅 위에 섰다.

근대 건축가로서의 고민과 시도를 계속했던 김중업의 작품 중 가장 주목받는 건 주한 프랑스대사관이다. 대지와 대지 위의 곡선이 이루는 관계의 조형은 건축 문외한이 봐도 아름답다. 한 시각예술 아티스트에게 이곳은 공간에 대한 경계를 다시 고민하는 계기를 준 곳이라고 했다. 때마침 김중업 전시 ‘김중업 다이얼로그’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올해 12월 16(일)까지 열린다.

연극배우가 추천하는 소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다섯 번쯤 읽은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작품이 달라진다. 처음 읽었을 때 루카스와 클라우스 쌍둥이는 비극적 운명의 한 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니까 거기까지만. 다섯 번 읽으면 다섯 번 다 울게 되는 장면이 있다. 여러 다른 매체에서도 자주 그 장면을 낭독하는 걸 듣게 된 후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여전히 듣고 읽을 때마다 운다. 아마 거기서 나를 보기 때문이겠지.”

지젝과 김연수를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추천한 책이라고, 출판사는 홍보 문구를 뽑았지만 이 책을 읽고 좋아하게 된 예술인들은 맨 처음에 가까운 예술인들에게서 조용히 추천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목할 부분은 ‘조용히’다. 감탄사를 요란하게 뱉으면서 추천을 할 만한 작품이 있고,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책을 쓱 내미는 방식으로 권하는 게 어울리는 작품이 있다. 한 작품에 위의 다른 추천 방식 둘이 공존하기도 한다. 그건 추천하는 이의 성격이 더 반영된 결과일 터다. 작품만이라면, ‘조용히’가 더 맞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이름의 철자 순서가 다른 쌍둥이 형제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이야기로 시작해 1956년 헝가리 반체제 혁명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2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연결된 3부가 주인 없는 거대한 운명처럼 이어진다. 처음에는 각 부를 한 권씩 분권해 나오던 것이 요즘은 한 권으로 묶여 나오고 있는데 책 표지 디자인도 그렇고 예전 세 권짜리 책이 더 낫다는 게 중론이다. 이미 독자가 되어본 이들에게는 1부, 2부, 3부 각각의 세계를 조금 떨어뜨려 놓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최근 자전적 이야기를 묶은 신작 『문맹』에서도 거짓말과 몽상의 어떤 경계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너무 두꺼운 책이 부담스럽다면 신작 『문맹』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아주 짧은 산문에서도 아고타 크리스토프 고유의 생생한 스타일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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