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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7 2016. 10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소설가 황시운

휠체어 사용자의 뮤지컬 관람기

2016. 10
칼럼사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생애 가장 아름다운 보름달을 맞이하던 오 년 전 어느 봄밤, 추락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인해 난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척수가 손상되면서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누구나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누구가 아닌 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자전거를 탈 수도 없는 삶을 누군들 염두에 두고 살아가겠는가.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두 다리 대신 휠체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게다가 장애 후유증으로 지독한 신경병증성 통증까지 얻었다. 내가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달라진 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친구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동료들은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하고 책을 출간했다. 고인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나뿐인 것만 같았다. 반복되는 수술과 오랜 병원 생활로 부모님께 경제적인 부분까지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던 주위의 조언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세상으로 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도 병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병원을 오갈 때마다 무심코 지나치던 예술회관에 내걸린 커다란 현수막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예술회관에서 상연 예정인 뮤지컬의 홍보 현수막이었다. 문득, 사고 전 마지막으로 본 뮤지컬이 떠올랐다. 그해 3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된 작품이었다. 대극장 안을 가득 메웠던 음악과 배우들이 뿜어내던 열정이 떠오르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도시의 예술회관에서 상연되는 작은 공연이지만, 그래도 어쩌면, 다시 한 번 그날의 열기를 느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 자리에서 바로 표를 예매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임을 밝히고 장애인 주차구역과 공연장 내의 장애인석, 엘리베이터의 설치 여부, 장애인 화장실 등 장애인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적지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외출했다가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어서 겪어야 했던 낭패를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드디어 공연 당일이 되었다. 일찍부터 서두른 덕에 예술회관에 도착했을 땐 공연 시작 시간까지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드물게 청명한 하늘에 만개한 벚꽃, 사방 흩날리는 꽃잎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지하주차장에 진입해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마다 불법 주차된 비장애인들의 차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와 같은 휠체어 사용자의 경우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이 아닌 곳에서는 하차가 불가능하다. 일반 주차 구역 두 칸을 차지하거나 그마저 용이치 않으면 차들이 오가는 통행로에서 하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그날도 나는 통행로에서 하차한 뒤 엄마가 일반 주차 구역에 주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차를 하는 동안 두어 대의 차가 날카로운 경적을 올리며 지나쳐갔고 그때마다 난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주차를 마치고 온 엄마와 함께 공연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건물 내부로 통하는 입구로 갔다. 그런데 건물 내부로 통하는 입구 어디에서도 엘리베이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예술회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하며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묻자 전화를 받은 직원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까지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문의할 땐 듣지 못한 말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물었지만 직원은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는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나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삼키며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직원은 다소 딱딱한 어투로 차를 빼서 지상주차장으로 다시 올라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별수 없이 나는 차들이 오가는 통행로에서 승차하는 위험을 또 한 번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다시 올라온 지상주차장의 입구는 쇠사슬로 봉쇄된 상태였다. 결국 다시 전화를 걸었고 예술회관의 직원이 직접 나와서 주차장 입구에 친 쇠사슬을 걷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공연 시작 시간까지는 삼십 분이 채 남아있지 않았다. 비장애인들과는 달리 승하차나 이동을 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텅 빈 지상주차장의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에 주차를 마치고 다시 하차한 뒤에야 예술회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진이 다 빠져 처음의 기대감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곳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이다. 예매한 표를 찾기 위해 중앙홀로 가려면 넓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는데, 그 계단에는 휠체어 리프트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나타난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서 나온 뒤 건물을 빙 돌아 정문을 통해서야 중앙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전에 제대로 설명을 해주었거나 안내 표지판만 세워놓았어도 그런 혼란은 없었을 터였다. 우리는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장애인화장실에 들러 소변주머니를 비우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숨 돌릴 틈도 없이 표를 찾아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연 시작 시간이 임박한 탓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 들어간 공연장 안에선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장애인석에 쌓여있는 짐들이 문제였다. 아무리 이용자가 적은 장애인석이기로서니 어떻게 공연장 내의 좌석에 짐들을 방치해놓을 수가 있는지, 그쯤 되자 장애를 가진 것이 나인지, 아니면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안내 직원과 엄마가 함께 공연이 시작된 뒤까지 대충 치워준 통로 쪽 장애인석에 자리를 잡고 여전히 쌓여있는 옆자리의 짐에 기댄 채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엄마 역시 예매했던 좌석이 아닌 뒷자리 아무 곳에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려 오 년 만에 보는 뮤지컬이었지만, 그날 공연을 보는 내내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감흥은커녕, 수다스러운 친척들에게 억지로 끌려와 싸구려 패키지여행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짜증스럽고 피곤했다.

다음번에 같은 장소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아마도 처음보다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왜 처음부터 쉬울 수는 없는 것일까.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배려가 얼마나 부족한지는 일일이 설명하기도 벅찰 정도다. 비장애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도 장애인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때에 따라서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약자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있는 곳이라는 뜻은 아니다. 많은 부분이 미처 몰라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내가 아무 불편 없이 걸었던 인도가, 경사로가, 계단이, 장애인들에게는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위험천만한 곳인지 나 역시 장애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이전까지의 내게 더할 수 없는 휴식과 위안을 제공해주던 미술관이, 극장이, 공연장이, 장애인이 된 나에게는 지나치게 멀고 험난한 곳이라는 것도 최근에야 실감했다. 문화예술이 비장애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장애인도 그 모든 것들을 동등하게 누릴 자격이 있는 이 사회의 일원이다. 부디, 비장애인들의 따뜻한 배려 덕에 장애인들이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되기보다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예술인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얻는다. 특히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접하는 것은 예술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자극이 된다. 예술인에게 있어 예술작품은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 중 하나이기에 문화 향수는 예술인에게 있어 밥을 먹는 것만큼 중요한,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다. 지체장애를 가진 소설가로서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던 경험을 통해 장애 예술인의 문화 향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소설가 황시운 사진
  • 소설가 황시운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
    장편소설 『컴백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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