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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예술인 칼럼

복지와 예술, 보편과 선별

2019. 6

글 김종휘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복지를 생각하면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부터 떠오릅니다. 이 대결적 구도는 서울시장의 사퇴를 불러왔을 만큼 이제는 국민상식의 영역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민 이자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서 보편적 복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관심사는 복지의 질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기본소득, 기초자본의 정책실 험에 대한 공론화를 통해 미래 의제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지는 대상별 범위와 속도, 질에 대한 논쟁과 토론은 있을지언정 보편적 권리로서 당연시되어 있습니 다. 이른바 ‘무상급식 찬반’에 대한 시민의 선택으로 당시 서울시장이 사퇴한 때가 불과 8년 전입니다. 복지에 대한 의문시에서 당연시로 사회적 의식의 보편적 변화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니 돌아봐도 놀랍습니다.

반면에 예술 하면 예술창작지원이 떠오릅니다. 예술가에게 공공이 예술창작을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가 법제화되기까지 적잖은 세월과 노고가 있었습니다만, 작금에 는 그 예술가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공공에서 때로는 ‘시민예술가’라는 신조어를 쓸 만큼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예술창작의 보편적 권 리에 대한 욕구의 정당성이 질문입니다. 이에 비해 전업/전문/프로 예술가에 대한 창작지원의 정당성은 취미/생활/아마 예술인에 대한 그것과 다른 분별에 있습니다. 자칭 타칭 예술인 누구나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특정한 예술가가 누려야 하는 선별적 권리의 문제가 됩니다. 마침 예술인복지법도 8년 전에 제정되었습니다.

예술과 예술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정책

일명 '최고은 법'으로 불리는 이 법 제정의 발단을 사회면 보도처럼 간추리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 생활고 사망’입니다. 법 제정의 전후 흐름을 결과적으로 돌아보 면 ‘홀로 사망에 이를만큼 심각한 예술가의 빈곤과 고독’이라는 프레임과 ‘시장의 돈벌이 노동과 국가의 밥벌이 복지가 방치한 거대한 사각지대에 처해 프리랜서 사망 ’이라는 프레임의 긴장 속에서 전자의 문제로 상황 정리된 형국입니다. 그 결과 예술인복지법은 예술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예술 활동을 업으로”, 2. “국가를 문 화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3. “창작ㆍ실연ㆍ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술인 복지 대상에 속하는 예술 인입니다.

이를 약하면 1.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예술인)도 아니고 2. 자칭 타칭 예술인 누구나도 아닌 3. 선별적 복지의 대상으로 특정된 예술인이 됩니다. 현행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재단은 예산의 압도적 제약 아래에서 긴급구호를 포함한 사회보장과 예술창작활동 지원을 혼합한 역할을 합니다만, 이 글의 초점은 복지와 예술, 예술과 복지의 관계는 현실에서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할지, 예술창작과 예술家/人의 현실과 미래는 보편적인지 선별적인지 하는 질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의 ‘앵 떼르미땅 스펙터클’이 탄생한 정책 배경과 변화의 과정에서 참조할 맥락과 사실이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의 예술인 복지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모습 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예술인 복지는 모든 예술인에게 보편적 복지가 될 수 있는가/되고자 하는가? 나아가 예술인 복지는 국민이자 시민의 보편적 복지가 될 수 있는가/되고자 하는가? 이 중에서 ‘되고자 하는가’의 의식, 의지, 정체성을 자문해봅니다.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원하는 학부모들이 지역 주민들 앞에 무릎 꿇고 우는 장면입니다. 장애인은 물론이고 대학생 기숙사나 예술인 임대주택도 반대하는 ‘우리 동네 집값 사수대’의 그 주민들을 악마로 설정하고 비판하는 일은 가장 쉬운 노릇 일 수 있습니다. 무릎 꿇고 울어야 하는 장애인 학부모들의 가슴속에 ‘거부되는 당위성’이 응어리지고 을도 아니고 병의 자리에 서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에는 한쪽을 당위의 자리에 고정하고 다른 한쪽을 욕망의 자리에 고정한 구도의 몫이 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정말 어 렵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존엄의 마당에 예술인 복지가 최대한 넓고 두텁게 퍼질러지길

연극배우이자 변호사이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김원영의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때문에 생각해봅니다. 욕망에는 욕망으로 상응하는 구도 여야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당위 대 당위의 구도는 전쟁과 학살로 귀결됐다는 역사가 교훈이라면 그렇습니다. 피아에게 치명적인 핵무기 보유국 증 가로 인해 전쟁 억지력과 평화 유지력이 나온다는 외교적 역설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반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는 사건사고의 현실에서는 당위 대 욕망의 구도로 짜인 장면이 부쩍 잦아져서 대체로 한쪽은 처참하고 한쪽은 악마가 되는 파국적 상황이 많아 보입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어느 쪽은 진실일까요? 종래에는 ‘있는 그 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예술인들이 먼저 연대하고, 국민이자 시민의 권리를 욕망해서, 9to6의 유형과 다른 자신의 처지를 특별하게 인정하게 만드는, 그러나 보편적 권리의 범주 안에 서 경계선을 넓히는 전략으로 한다면. 말은 쉽습니다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앵떼르미땅 스펙터클’이 태어나서 걸어온 궤적이 대략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전 에 존재의 기호와 기의를 재조율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술家인가, 예술人인가? 문화기획者인가, 문화기획人인가? 家와 者는 물론이고 人 도 서로 연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술-하는 개별-됨의 자리가 특수합니다만, 그래서 더욱더 함께-함의 보편적 권리의 존재로 살아가는 마당이 절실합니다. 그 마당에 예술인복지가 최대한 넓고 두텁게 퍼질러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