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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칼럼 박새봄 극작가

‘위계’와 ‘관행’의 낡은 덫

2018. 4
위계와 관행의 낡은 덫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온라인 SNS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각자가 속한 조직, 업계 내에서 있었던 성폭력을 개별적으로 고발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 흐름은 이렇게 전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사회 주요 이슈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이 거대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한 여성검사의 용감한 선택 덕분이다.

전혀 놀랍지 않아서 너무나 놀라웠던 고발

2018년 1월, 한 검사가 황금시간대 메인 뉴스에 나와 검찰조직 내에서 자신이 당한 부당한 일을 고발했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직업과 실명과 얼굴을 전 국민에게 공개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알렸던 부당한 일은 수년 전 검찰 내 고위직에 있던 사람에게 자신이 당한 성추행 사건이었다. 엄청나게 자극적이거나 엽기적인,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끔찍한 내용은 아니었다. ‘술에 취한 직급 높은 남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여성이며 부하직원인 자신의 몸을 함부로 더듬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 중 아무도 그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내가 느꼈던 놀라움과 충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즉각적으로 보복할 수 없었던 성추행을 당해본 여성들은 안다. 그 더러운 손이 스쳐 지나간 내 몸의 한 부분을, 그 추잡한 눈길이 훑고 지나간 내 몸의 한 부분을 도려내 버리고 싶은 기분을. 항의하여 사과를 받고, 고발하여 처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살아온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존엄을 침해한 상대의 더러운 손목을 잘라버리거나 그 추잡한 눈을 찔러버리는 상상을 하기보다는 침해당한 자신의 몸을 도려내는 상상을 하는 게 더 익숙하다. 내키는 대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상상’인데도, 그 상상 속에서마저도, 여성들이 상대의 손과 눈을 처벌하기보다는 침해당한 자신의 몸을 도려내는 상상을 더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것만이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유일한 거부였기 때문이다. 칼날을 자신에게 대고 스스로를 도려내며 아프게 버티고 있던 수많은 여성들은 한 여성검사가 자신이 당한 성추행을 고발한 순간, ‘우리의 칼날은 이제 가해자를 향해야 한다’는 외침을 들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단과 예술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에서 폭발적인 고발이 터져 나왔고, 미투 고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이 고발의 문화가 한때 유행처럼 번지다 곧 사그라들 거라고 믿고 있겠지만, 어쩌면 언론의 요란한 관심은 곧 그럴지도 모르지만, 늘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던 성범죄에 ‘칼날은 가해자를 향해야 한다’는 정의가 이렇게 국민적 공감을 얻은 역사 이후의 세상은 이전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과거의 피해를 고발한 사람들의 용기로 인해 현재나 미래의 피해자들은 자해와 체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인터뷰를 자청한 여성검사가 전하는 ‘부당한 사건’의 전말이, 그 내용이 ‘전혀 놀랍지 않은, 익숙한 일’이라는 사실에 한 번, 그다음엔 마치 일반사회를 대표하는 것 같은 유명 남성앵커가 그 사건의 전말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놀라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할 ‘억울한 일’로만 생각했던 그 일들이, 늘 조심하며 피하려고 애쓰는 게 당연했던 그 일들이 사실은 저렇게 ‘사회적 고발이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확인한 순간, 나는 거의 환희에 가까운 어떤 감정을 느낀 것 같다. 정말이지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희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환희와 동시에 느꼈던 당혹감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사소한 일에도 제법 날 세우며 살았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더 많은 시간 ‘아랫사람’으로 살면서 ‘윗사람’ 들이받는 일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던 나조차도, 그동안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침묵’을 너무나 당연하게 용인하며 살아왔다는 걸 소스라치게 깨달은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너무나 자명한 ‘부당함’인데도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야, 누군가의 용감한 고발을 보고 나서야 겨우 ‘고발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당혹스러웠다.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위계’의 억압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이었는데도, 나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나는 ‘위계’에 관해서는 자유로웠을지 몰라도 ‘관행’을 이겨낼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미리 백기를 들고 살았던 게 아닐까.

‘위계’에 기대고 ‘관행’에 의지하는 예술

미투 고발이 예술계 특히 연극계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것에 대해 ‘왜’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용감한 고발이 많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먼저 터져 나와야 할 만큼 ‘심하게 썩어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직 미투 고발이 나오지 않은, 그래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한 다른 분야와 비교하며, 예술계 가해자가 가졌던 권력이 다른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덜 무섭고 더 만만한 가해자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많은 고발이 터져 나온다고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많은 요인이 조금씩 모두 섞여 있겠지만, 누가 물을 때마다 나는 순진하게도 이런 낭만적인 대답을 하게 된다. “더 강렬하게 인간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들이라서, 더 강렬하게 인간의 추악함을 고발합니다.”

서지현 검사에 이어 같은 자리에 나온 고발자 최영미 시인은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한 잡지에 고은 시인의 추행을 고발하는 시 〈괴물〉을 쓰며 미투를 외쳤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 거장의 이름을 ‘En’으로 정확히 표기하며 괴물을 고발한 시인에게 ‘왜’ 그런 시를 쓰게 됐느냐고 앵커가 물었을 때, 시인은 ‘내가 이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연극계에서 폭발적인 ‘고발’이 이어졌던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믿는다. 다른 어떤 것에 기대지 않고 오직 ‘사람’으로, ‘사람과 세상’을 탐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연극계에서 ‘고발이 많았던 이유’와, (고발할만한) ‘범죄가 많았던 이유’는 결코 같지 않다. 전자가 예술이 가진 힘과 희망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예술의 발전을 막는 낡고 조잡한 덫이 무엇이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가들 중에는 사실 ‘미쳐버린’ 사람들이 많다. 비윤리적인 사람들도 많다.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예술가도 많고, 당대의 상식과 윤리를 비웃으며 기행을 일삼던 예술가도 많다. 준엄한 금기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넘어버린 도발적인 예술가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을 흠모하고 그 가치를 경외하는 후대인들은 은근히 그들이 삶으로 보여준 그 광기와 탈선, 퇴폐적인 기행마저도 선망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모든 광기와 기행이 위대한 예술가들의 처절한 고뇌와 치열한 투쟁의 산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투 고발로 호명된 예술가들이 저질렀다는 온갖 난잡한 짓들이 그것과 같은가? 쓰러지는 거목들을 보호하고 싶고 변명하고 싶은 사람들은 곧잘 이 모든 추행이 ‘예술하느라’ 벌어진 일이라고 우기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태도야말로 예술을 모욕하는 것이다. 겨우 ‘위계’에 기대서야 저지른, 위계상 매우 안전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야 저지른 그 범죄들은 광기도 도발도 아니다. ‘계산된 광기’가 무슨 광기인가. 선명히 객관화할 수 없는 ‘창조’와 ‘예술’이라는 애매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사회통합을 위한 윤리적 잣대로만 가늠해 평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수 있지만 관행에 기대, 위계에 기대 안전하기 때문에 저지른 저 수많은 추행들을 예술의 어떤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은 오직 자신이 진지하게 추구하는 예술 없이, 겨우 ‘관행’과 ‘위계’에 기대어 예술가연 하는 사람들이나 할법한 생각이다.

아래위 따지기 좋아하는 대한민국 어느 분야에나 자기가 누구인지보다,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통하는 사회라서, 관행은 그 자체로 힘을 얻는다. 그게 무엇이든 ‘해 오던 일’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것, 그가 실제로 무슨 능력을 가졌든 ‘위’의 자리를 얻으면 ‘윗사람’의 권력을 갖게 되는 것. 이런 문화 때문에 ‘늘상 해 오던 대로 하면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나 비예술적인 인간인가. 예술계의 성범죄는 본질적으로 이런 비예술적 인간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희망인 것은 사람의 가치를 믿는 예술적 인간들이 아직 많아서 그런 비예술적 인간들을 더 가열차게 고발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것은 하나하나 호명된 개인들 각각의 추행이 아니다. 무심결에 위계와 관행이라는 낡은 덫에 발목 잡혀있던 예술계 전반의 둔감함에 대한 폭로였다. 용감한 고발은 성폭력뿐 아니라 존엄을 유린하는 모든 폭력, 모든 빼앗김, 모든 농간에 대해서도 이어져야 한다. 미투 고발은 지난 과오, 지난 과거를 향한 사적 복수가 아니다.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인간을 믿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아름답고 용감한 선택이다. 위계의 덫, 관행의 덫에 걸려 몸과 영혼이 상한 사람들이 힘차게 그 낡고 저열한 덫을 부수고 뚜벅뚜벅 자신의 삶, 자신의 예술의 길을 걸어 나가기를 바라본다.

  • 박새봄 극작가
  • 박새봄 극작가 현 청강대 뮤지컬스쿨 초빙교수
    연극 《강철여인의 거울》, 인형극 《시간극장》, 음악극 《꼭두-마지막 첫날》,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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