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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1 2017. 12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인터뷰 2016년 창작준비금 사업 선정자

창작을 준비하는 순전한 시간의 동행,
〈2016년 창작준비금 지원〉 선정자들을 만나다

2017. 12

〈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은 예술인이 예술 외적 요인으로 창작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지원하는 사업으로, 2013년 이후 2016년까지 총 11,214명이 이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예술인 창작준비금은 예술인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줄까? 2016년 창작준비금을 받은 피아니스트·클라리네티스트 은성호 씨, 연극배우 백대현 씨, 소설가 전혜성 씨를 만나 창작준비금과 창작활동, 예술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사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정리 김지승

인터뷰 #1 평생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꿈 피아니스트·클라리네티스트 은성호

올해 7월 발달장애인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독주회를 개최한 은성호 씨는 〈2005년 전국 장애인 종합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음대에 진학,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10년간 517시간의 봉사 연주를 하기도 했다. 앙상블 활동과 솔로 연주활동을 지속하면서 음대에 진학, 꾸준한 노력으로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현재 국내 최초 발달장애 전문 연주단체 ‘드림 위드 앙상블’의 수석단원으로 활동하며 아름다운 꿈을 펼치고 있다.

* 인터뷰는 은성호 씨의 어머니가 대신했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어렸을 때 성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곤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을 따라 오르간을 치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동네 피아노 학원에 부탁해 처음 피아노를 접하게 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한 기회에 성호의 절대음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아노 건반 10개를 누르면 10개의 음을 다 맞춘다. 이조, 전조가 몹시 어려운데 피아노 악보를 보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걸 보고 모두가 성호의 음악적 재능을 언급했다.

성호의 경우 음악을 통해 감정 표현을 배우고, 서투르던 감정 표현이 좋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표현이 기계적이고 딱딱한 경우가 많은데 앙상블 활동을 하면서 표현 능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첫 독주회의 의미가 남다를 듯하다. 무엇보다 두 악기를 동시에 연습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성호는 현재 ‘드림 위드 앙상블’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1달에 약 75시간 이상을 근무한다. 보통 1주일에 5일 정도, 5시간 이상 일하는 셈이고 연습은 또 따로 해야 한다. 집에서는 소음 민원 발생 때문에 연습이 어려워 남아서 연습을 하고 1주일에 2회 이상 레슨도 꾸준히 받고 있다. 다른 연주자들은 독주회를 진행하기 위해 최소 3개월간 몰두한다고 하던데 성호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림 위드 앙상블’에 성호의 피아노, 클라리넷 파트가 있어서 지방 공연도 빠질 수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또한, 경제적인 부분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성호는 최저 임금을 받고 있다. 어떨 땐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고작 최저 임금이라니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돈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는 삶을 보상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 세 끼는 먹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지만 성호를 통한 사회적인 인식개선 효과도 크다고 본다. 언젠가는 예술인으로 당당하게 대우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2014년 파견지원 사업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 재단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나?

성호가 음악을 시작할 즈음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그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이었는데 미국의 지인이 재단을 소개해주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 문의해보라고 하길래 무작정 찾아갔다. 예술활동증명을 받으라고 해서 성호 경력을 이력서로 제출했고, 한 달 정도 후 예술활동증명이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2014년 파견지원 사업 때는 ‘하트하트’ 오케스트라에서 6개월간 활동했다. 당시 파견지원 사업 면접을 보고 워크숍에 참석했는데 참석자 중 성호만 장애가 있는 것 같아서 사업 참여 자격 등에 대해 우려가 되었다. 그때 담당자에게 “예술 활동을 이렇게 많이 했는데 당연히 예술인이고 자격이 되죠”라는 말을 들었다. 편견 없이 대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창작준비금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창작준비금 지원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도 성호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산다. 전자파가 걱정되어서 말릴 정도이다. 자폐의 경우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고, 더구나 성호는 악기를 2개나 다루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다. 창작준비금 지원으로 경제적 부분이 해결되면서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지속적으로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창작준비금 덕분에 그 부담이 줄었고, 성호의 연주 실력이 나아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좀 더 프로로 다가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너무 감사하다. 가뭄의 단비 같았다.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에 대한 주변 반응은?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다. 연주하는 예술인들에게 경제적으로 굉장히 큰 지원이 된다. 성호가 직업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독주회를 할 수 있었던 것,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정부의 지원 사업이 힘이 되었다. 성호처럼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후배들도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하여 재단 사업을 지원받고 있다. 성호를 통해 재단을 알게 되어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받은 친구들도 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바람을 가진다. 내가 내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것. 그런데 성호가 음악을 시작하면서 바람이랄까 목표가 달라졌다. 먼 훗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성호가 이 분야의 연주자로서, 예술인으로서 평생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장애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금보다 더 전문적인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 성호에게 예술이 직업이 되고, 성호가 비장애인 예술인처럼 인정받는 것. 그게 최종 목표다.

인터뷰 #2 시간을 초월해 소통하는 연기로 연극배우 백대현 씨

타이베이 공동제작 〈탈북자〉, 한일 공동제작 〈모든 것은 갑자기 온다〉, 아시아 5개국 협력 프로젝트 〈Asia Meets Asia in Busan〉 연출 등 백대현 씨는 아시아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기를 시작한 지도 19년이 넘어간다는 그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을 연극에 있어 주요한 힘으로 꼽는다.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지금 돌아보면 정말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것 같다. 예전부터 연기에 관심은 있었고, 극단 한강에서 〈교실이데아〉라는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연기가 무엇인지, 연극의 매력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연극을 하면서 많이 배운, 어쩌면 내 연기 생활을 바꿔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있다. 〈엄마 안녕〉이라는 작품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극단 쉼의 대표 작품이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러 가기 직전 상황과 분신 이후 어머니의 기억이 연결되는 이야기와 대화가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영혼이 어머니에게로 오는, 굉장히 시적인 작품이었다. 움직임도 많지 않아 처음에 연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연출은 자꾸 다른 것을 원했지만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전태일 열사가 유언하는 장면에서 역할을 소화하다 보니 순간 다리가 떨리면서 눈물이 났다. 그때 깨달았다. 연기란 테크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별거 아닌 듯하지만 그걸 몸소 느낄 수 있게 해준 작품이라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재단을 알게 된 계기와 창작준비금 사업에 대한 주변 반응은?

재단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웃음) 특별히 알게 된 계기가 따로 있지 않다. 재단이 설립된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이런 곳이 설립될 예정이니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창작준비금의 경우 신청한다고 다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동료들 중 몇몇이 사업을 신청하면, 그중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받지 못한다. 아무래도 뭔가 좀 미안한 마음에, 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지원금을 받아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원금이 도움이 되니까 그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창작준비금을 신청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보완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이 사업에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2년에 한 번씩 사업에 참여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때는 받고, 어느 때는 못 받으면 예술인들의 불규칙한 경제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1년에 한 번씩이라든가 좀 연속적으로, 훨씬 안정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창작준비금 지원자 중 많은 분들이 서류 절차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망설이는 분들이 많은 이유다. 내 경우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신청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나이가 있는 분들, 컴퓨터 사용이 어려운 분들은 이런저런 서류 준비가 어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분들도 신청할 수 있도록 서류 준비에 도움받을 수 있는 창구가 곳곳에 있다면 좋을 듯하다.

창작준비금 지원이 가져온 변화가 있다면?

연극으로만 생활하기에는 금전적으로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투잡을 뛰는 셈이다. 아이들 강의 준비하랴, 연극 공연 준비하랴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내 본업인 연극에 충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창작준비금을 받고 적어도 2~3달 정도는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큰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정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연극은 그것만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직업이 아니다. 내 형편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 돈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 말고 얻을 수 있는 것, 의미 있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 같은.

옛 제사장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듯이 나는 연기를 통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배우로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이고 또한 가장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이 내 무대 위 모습에 한없이 빠져들었으면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누구나 믿고 보는 배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터뷰 #3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소설가 전혜성 씨

잊히고 사라진 줄 알았던 꿈이 거기 있었다. 오랜 꿈인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늦깎이로 국문학과에 덜컥 입학한 게 시작이었다. 학·석사 과정을 거쳐 『울산문학』 수필 신인상을, 2013년도에는 『문예운동』에서 소설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 발간한 첫 장편소설 『강변의 자전거』로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소설가의 자리에 우뚝 섰다는 전혜성 씨는 소설가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뭔지 모를 책임감이 무거우면서도 흡족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꿈이 소설가였나?

그렇다. 박경리, 박완서, 이문열, 오영수 등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꿈을 꿨다.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발간될 소설책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현실은 꿈과 너무 멀었다. 마음속으로만 꿈을 간직하고 살았던 것 같다. 아들이 군에 갈 즈음 비로소 시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좀 여유가 생겼고 소설에 대한 꿈이 다시 꾸물꾸물 올라왔다. 처음에는 국문학과에 진학해야 소설가가 되는 줄 알고 진학했다. 나중에야 글을 쓰기 위해 꼭 국문학과를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학사 과정 후 2002년부터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테크닉적인 부분을 더 배우고 싶어서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진학했다. 거기에서는 소설보다 수필을 더 쓰게 되었다. 그때 써온 수필로 수필 신인상을 받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나도 조금씩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그 후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기도 했다.

2016년에 나온 첫 장편 『강변의 자전거』는 어떤 작품인가?

강변에서 자란 철부지 소녀 초희의 시선에서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담아낸 성장소설이다. 『강변의 자전거』는 나에게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작품이어서 의미가 있다.

원래 제3자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려 했던 이야기인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쉽지 않았다.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신선하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결국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게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소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목마름이 심해진다. 앞으로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

창작준비금을 통해 책을 발간했다. 재단을 만난 계기가 있다면?

현재 울산문인협회 회원, 소설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울산시에서 예술인들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이 있는데 장르별로 소수 인원 대상으로 지원하는 거라 경쟁률이 높다. 지인이 이 지원금을 받아서 나도 지원해봤으나 경력이 짧아 떨어졌고 그러던 중 다른 지원 사업을 찾다가 재단을 알게 되었다.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해야 재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간의 활동내역들을 제출했고 20일 후쯤 예술활동증명이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후로 재단 사업이나 소식 등을 이메일과 문자로 받아보고 있다. 그 통로로 재단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창작준비금 신청 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제출할 서류가 많아서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소득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갔던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서너 군데 정도 다녔다. 하지만 지원금을 받는 데 이 정도 수고도 없다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 정도 발품을 팔고 시간을 써서 지원금을 받아 소설집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에 힘들 줄 몰랐다.

창작준비금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떤가?

아직 재단을 잘 모르는 울산 지역 예술인들이 많은 것 같다. 『강변의 자전거』를 발간하며 출판 기념회를 열었는데 그때 재단 지원금을 통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대부분이 그런 곳이 있었냐는 반응으로, 재단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재단에 대해 관심과 질문이 이어졌다. 창작준비금의 경우 소득과 건강보험료 중심으로 심사를 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 예술인들도 많지만, 그 외에도 재단의 다양하고 좋은 사업들이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인들의 기대가 크다.

창작준비금 지원 이후 변화가 있다면?

가장 큰 변화라면 창작준비금을 통해 작품을 발간하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원금을 받기 전에는 주변 몇몇 지인들만 아는 ‘소설 쓰는 사람’이었는데 책을 발간한 이후로는 인지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웃음)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뭔지 모를 책임감도 생겼다. 무엇보다 어릴 적 꿈을 이뤄서 너무 흡족하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바람이 있다면?

큰 바람은 없다. 계속 쓸 수 있길 바란다. 그러다가 소설집 한 권을 더 집필하고 조금씩 소설가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바라는 건 그 정도다. 그냥 편안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 어떤 예술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소설가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름을 알리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수많은 작가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면서 자기 세계를 지켜야 한다. 욕심이라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설가로 인정받아 인세로 한 달에 30만 원씩만 받았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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