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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 2017. 3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인터뷰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 홍수영 대표

창작자와 작품들을 향한
작은 공간의 응원

2017. 3

볕이 풍성하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아래, 옥인동의 낡은 연립주택 3층. 남향으로 자리 잡은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의 첫인상이다. 이곳의 주인인 홍수영 씨의 인상도 여리지만 풍성한 겨울볕과 닮아 있다. “이상하고 작은 서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인사 그대로 이상하고 작은 이곳에서 책과 책, 사람과 사람, 책과 사람이 만난다. 수영 씨는 그 만남들을 예기치 않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글 김지승 / 사진 이현석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 홍수영 대표

서점에 들어서면 주인의 취향이 솔직하게 반영되고 채운 책장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개조한 거실 한가운데에 설치미술가 로와정의 백도(moon's path) 테이블이 놓여 있다. 딱 10권만 꽂을 수 있는 책꽂이, 책 한 장 한 장이 붕대처럼 부러진 부분을 감싸고 있는 의자도 로와정의 작품이다. 공간을 위해 특별히 제작을 의뢰한 것이라고 했다. “서점이자 특정 작가의 상시 전시실인 셈이죠.”
실험 서점, 복합 문화 공간, 예술 지향 커뮤니티 등 서울 오감도를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하지만 영업시간이 따로 없고 방문 예약을 해야 하는 이곳을 그 성격에 가깝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느린 시선과 대화가 필요했다.

서울 오감도를 열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눈이 펑펑 오는 날, 버스 안에 갇혀 있을 때 이런저런 공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공상 중 하나였어요. ‘서점 주인이면 좋겠다, 행복할 것 같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 이상향이 있지만 그걸 향해서 직진하게 되지는 않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러다 우연히 로베르트 무질의 신간 번역자 북토크에 참가하게 된 게 계기가 되었죠. 우선 『생전 유고』라는 제목에 충격을 받았고, 북토크에서 들은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은 로베르트 무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고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어렵게 살았다고 해요. 반면, 그때 무질과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낸 한 작가는 이탈리아에 수영장을 소유할 만큼 많은 부를 얻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기억 못하는 작가가 되었고요. 그 얘기를 듣고 순간, 나도 무질의 책 10권으로 서점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결심한 날이 4월 15일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 로베르트 무질의 기일이었더라고요. 우연과 우연이 겹친 2015년 4월 어느 날, 지극히 개인적인 프로젝트처럼 시작된 일이에요. 당장 제가 가진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긴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서점을 그리고 있었나요?

덜 유명한, 어쩌면 숨어 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작가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무질은 이제 충분히 유명한 작가이지만 당대에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처럼 사후에 길게 생명이 유지되는 작가들이 있는데 현재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혹은 굉장히 좋은 작품이더라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아티스트, 작가, 책 들을 소중하게 선택해서 소개하고 싶었어요. 살면서 제가 접하고 발견한 작가나 작업자들, 로와정 작가나 헤적프레스 같은 독립 출판사가 그런 예가 되겠죠.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 건축가 아틀리에 큐레이터이시기도 한데, 이런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영향을 주거나 받는 게 있나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줄곧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졸업 후 이런저런 관련 일과 생계를 위한 일, 하고 싶은 일들과의 괴리를 경험하기도 했고요. 현재는 건축가 아틀리에에서 오피스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어요. 기업으로 치면 홍보부랄까, 크고 작은 기획들을 할 일이 많거든요.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영추 포럼’을 여는데, 전반적인 문화 예술적 기획으로 접근해서 다년간 진행하고 있어요. 연도마다 대주제를 선정하고 그와 맞는 태도를 가진 편집자, 아티스트, 학자 등을 초대 강연자로 섭외하죠. 기본적으로 창작자, 생산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에요. 물론 단순한 일도 하고요. 아, 회사 내에 ‘한칸서점’이라는 걸 제안해서 말 그대로 책장 한 칸에 ‘영추 포럼’에 모셨던 생산자, 아티스트, 학자 들이 쓴 책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고 작은 서점을 두 개나 하고 있는 셈이네요.(웃음)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  홍수영 대표 서울 오감도 책장의 책들을 큐레이팅하는 기준이 있나요?

우선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특별한 이슈들을 선별했어요. 최근에는 난민, 여성에 관한 주제로 묶기도 하고, 사랑에 관한 주제들로 만든 칸도 있어요. 제가 공부하는 책만 모아놓은 칸도 있고요. 책장의 분류가 굉장히 어수선한 면이 있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름 관심 분야를 꼽아서 배치해요. 희곡, 사진, 그림책, 시… 장르는 다양하고, 몇몇 독립출판물들도 선별해서 소개하고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서점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왜요. 많이 팔고 싶은데…(웃음) 소수만이 공유하고 좋아할 만한 예술가나 작가들이라도, 그러니까 양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접하고 싶어요. 열 권만 꽂는 책꽂이에 특별히 선별한 것들을 넣어두는 것도 그런 이유에요. 발견하고 싶고, 주목하고, 또 소개하고 싶어서요. 그 때 그 때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어요. 보통 책을 한 권이나 두 권 정도 구매하는데 어떤 때는 일부러 열 권을 주문하기도 해요. 제가 파산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응원한다고 할까요? 이런 창작물을 낸 예술가, 편집자, 이런 기획자, 출판사… 그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거든요. 제가 혼자 보내는 박수 같은 거죠. 열 권을 산다고 그들에게 사실 무슨 힘이 되겠어요? 그래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 누가 알든 말든. 혹 알지 못하더라도요.

서점에 진열할 책을 고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겠어요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을 찾는 일은 아무래도 그렇죠. 일시적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한 사회일수록 지속적으로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사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생각보다 간단해요. 제가 갖고 싶지 않은 책은 사지 않아요. 마지막까지 팔리지 않거나 이 서점이 실패한다고 해도 제가 갖거나 친구에게 주고 싶은 책을 구비해놓으면 영원히 망하지 않고, 실패라도 성공한 실패가 되지 않겠어요? 이게 저만의 영업 비밀이에요.(웃음)

달처럼 천천히 변하고 움직이는 공간 ‘정원과 서재’라는 낭독회도 열고 있죠?

낭독회는 서점보다 일찍 시작했어요. 이곳으로 이사하기 전 한옥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음력 보름에 모여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나누는 모임을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보통 다른 낭독회는 이미 큐레이팅된 상태에서 진행되지만 ‘정원과 서재’는 자유로워요. 참석하는 개인이 큐레이터가 되는 건데, 그렇게 한둘이 자기 책을 가지고 모이면 타인의 서재들이 오롯이 한 자리에 있게 되는 거죠. 일정 시간 묵독을 한 후에 좋아하는 구절과 페이지를 돌아가면서 나눠요. 개인에게 의미 있고 이미 정제된 책들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깊게 공유가 돼요. 세 명이 모이면 세 권의 책을 같이 읽게 되는 거예요. 서로 듣고 서로 읽어주는 행위 자체에 의미도 있고요.

북토크가 있기도 하고, 예약하면 작업실로 쓸 수도 있죠? 주로 어떤 분들이 다녀가셨나요?

북토크나 작업실 사용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에요. 가장 최근에 진행한 건 박선민 작가 토크이고요, 기사가 나갈 때쯤엔 로와정 작가와의 만남도 있었겠네요. 북토크에 참여하신 분들과 ‘책친구’가 되기도 하고, 느슨하면서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되니까 여러모로 제게도 도움이 돼요. 작업실 사용은 예약을 받고 미리 다과를 준비해드리고요. 영화 공부하던 분, 디자인 전공 대학원생, 작가… 그런 분들이 다녀가셨어요. 당연하게도 이곳에 많은 분들이 오시진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들 아시고 시인이나 소설가 분들이 뜻밖의 방문을 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 분들이 이곳의 문을 노크한다는 건 굉장한 사건이죠. 한 권의 책이 맺어주는 인연 같은 거라 기쁘고요.

‘책친구’라는 말 좋네요.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요?

다녀가신 후 손편지를 보내신 분이 있는데 제가 소개한 책과 카페를 경험한 소회와 안부 등을 전하면서 미술관 초대권을 동봉하셨더라고요. 또 작업실이나 스터디 장소로 사용하신 뒤에 과일을 놓고 가시거나 쪽지를 남기는 경우도 있어요. 잊지 않고 가끔 찾아주는 책친구들은 동네 이웃이기도 한데, 그런저런 마음들이 드물게 있어서 귀하고 오래 기억하게 되는 듯해요.

예술가들에게 이런 공간이 갖는 의미는 좀 더 특별할 것 같아요

이곳은 보통 거주 목적으로 쓰는 사적인 공간 일부를 분리해서 공적인 공간으로 만든 거잖아요. 거기에 로와정 작가의 설치작품들이 놓여 있고, 2월 한 달은 박선민 작가의 사진이 벽에 내내 걸려 있어요. 그러니까 작품들이 전시되는 공간이기도 한 거죠. 이곳을 찾는 분들과는 전시회에서 할 수 있는 대화가 가능해지고요. 소비와 유행에 치우치지 않는 선택으로 책을 소개하고, 예술적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모이는 이 공간이 창작자들에게 미약한 응원이 되길 바라곤 해요. 이런 공간이 많아졌으면 좋겠고요. 주인의 개성이 살아 있어서 그 개성에 맞는 발견과 소개, 응원이 함께하는 곳이요.

앞으로 이곳에서 또 해보고 싶은 실험이 있나요?

‘서울 오감도’는 미리 약속을 해야 여는 서점이기 때문에 영업시간이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여타 서점에 비해 사용자가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건강이 좋지 않아 작년 말부터 휴식이 길었는데요, 회복되면 정기적으로 서점을 여는 날짜를 정해보려고 해요. 그런다고 손님이 갑자기 확 늘거나 하진 않겠지만요.(웃음) 또, 특정 책이나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을 기획해보려고요.

실험 서점 ‘서울 오감도’ 그런 실험들이 이어지면서 공간이 서서히 달라지겠네요.

살면서 보름달을 몇 번이나 볼까요? 꽃은?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 않아요. 그 흐름들을 종종 떠올려 보거든요.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여는 공간이지만 이 안에서 이번에는 이런 일들을 제안하고, 다음 달에는 이런 만남을 가지면서 그렇게 흘러왔어요. 이전 공간을 잃었을 때나 몸이 아팠던 순간에도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찾아온 사람들 덕에 묵묵히 또 이어갈 수 있었어요. 여린 끈들이 이어가는,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달이 매일 모양을 바꾸듯이 이 공간도 공간만의 주기를 만들어가면서 움직이며 변하고 있고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 수영 씨는 진열된 책과 설치 작품, 사진 등을 소개했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 로와정의 다양한 작품들, 박선민 작가의 사진 작품, 독립출판 헤적프레스, 부정기 간행물 「versus」에 실린 정지돈 작가의 소설 등. 인터뷰 답변 그대로 작품들을 소중히 대하며 소개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어떤 서점에서 이런 소개를 받을 수 있을까? 끝으로, 수영 씨가 최근 가장 감동적이었다면서 읽어준 글을 소개한다. 좋아하고 응원하는 편집자의 청첩장에 인쇄된 글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문장은 이 이상하고 작은 공간과도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