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바라본
예술가의 주거, 그리고 작업실
2017. 2
지난해 11월 서울문화재단에서 주최한 국제심포지엄 ‘최소한의 창작조건, 예술가의 작업실’은 예술가 아틀리에라는 화두를 둘러싼 각국 지원정책과 다양한 사례를 접할 좋은 기회였다. 프랑스 정책과 사례 소개를 위해 참가했던 나는 사실 한국의 사례발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정확한 실태는 알지 못하지만, 지난 십여 년간 많은 문화재단의 탄생과 함께 다양한 차원의 예술가 아틀리에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심포지엄에 소개된 한국의 사례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사례들의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면모는 주목할 만했으나, 한국 예술가들의 자생적 아틀리에 운영의 성공 키워드는 결국 ‘마음씨 좋은 건물주’로 귀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로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공동 아틀리에 활동이 오롯이 개개인의 자생적인 의지와 능력에만 기반을 두고 운영되며 공적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프랑스에는 각 단계의 지방자치단체, 즉 도 차원뿐 아니라 시청과 구청마다 문화예술과 관련한 사항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질문과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아틀리에를 비롯한 예술지원과 관련한 궁금증을 가진 작가들을 적절한 기관이나 부서로 연결해 줄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아틀리에’라는 단어로 통칭하는 예술가의 작업 공간은 크게 주거복합형과 작업중심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거는 의식주라는 삶의 기본 조건 중 하나로, 예술가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술가의 작업실 역시 노동자에게 사무실 등 노동 공간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공간이 된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작업실은 다른 직업군과는 약간 다른 의미가 있다. 예술 창작이라는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예술가의 생활을 관통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잠 못 이루는 밤 갑자기 예술적 영감을 받기도 하고, 가족과의 행복한 일상에서의 기쁨이 창작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집이란 단순한 주거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곳곳에 작가의 성향과 작업의 일면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있게 된다.
프랑스에는 생활주거공간과 전문작업공간이 결합된 형태의 아틀리에 지원이 존재하는데 공공지원의 범주에서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형태는 아니다. 1960년대 뉴욕시의 사례에서도 주거 용도를 철저히 배제하고 작업을 전제로 공간을 지원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프랑스조차도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관련 정책이 작업형 아틀리에 지원을 강화하는 추세로 진화하고 있으며, 전 파리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1기 임기 초기부터 작업형 아틀리에 지원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발전시킨 것도 이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에서 예술가들에게 주거공간이 결합된 형태의 아틀리에를 지원하는 명분은 단순하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시민의 노동 중 하나로 인식하고 이 노동이 창출하는 이윤 자체가 정기적인 소득형태를 가질 수 없는 특수한 구조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주거형 및 작업중심형 아틀리에 지원을 장기적 차원의 지원이라 볼 때 단기적 작업공간지원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현재 한국에는 각 지역문화재단에서 운영을 중심으로 이러한 형태의 지원이 활성화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경우 대개 작업공간뿐 아니라 작품 재료, 기간 이후 전시기획 그리고 도록 제작까지, 수개월에 걸쳐 일상적으로 갖추기 힘든 창작조건이 제공되므로 작가에게 일종의 프로모션과 같은 지원 효과를 낼 수 있다. 반면 주거형 아틀리에 지원의 경우는 레지던시와 같은 특별한 작업환경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예술가에게 인간적 삶의 기본 조건 중 하나인 주거요건을 보조하면서 동시에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가 있다.
사실 공적인 예술가 작업실 지원 정책에서 주거형, 작업형, 혹은 레지던시 중의 어느 것이 더 지향되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각자의 특성과 장단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 개발에 동반되어야 하는 예술과 예술가 인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다. 각국의 문화정책 속에는 그 사회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을 인식하는 사회적 합의가 녹아있다. 예술가 지원 정책을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예술가, 인간 생활 안에서 예술이 가지는 위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와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정책은 지속력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근 행복주택 사업대상에 예술가가 포함된 것은 매우 괄목할 만한 변화이다. 예술가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구체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의미한 시발점으로 삼아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예술가들의 자리 찾기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개념이 매우 중시된다. 예술가는 기타 노동자와 같은 방식과 형태로 이윤을 창출하지는 않으나, 예술활동을 통해 창출하는 사회문화적 이윤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동의 이윤 개념을 보다 확장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라마다 문화와 환경이 다르므로 프랑스의 사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역사 동안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전통을 이어오면서 시민들의 의식 속에 예술에 대한 인식이 깊숙이 자리한 프랑스가 실행하고 있는 다양한 예술지원 정책들은 우리 사회에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아틀리에 지원은 보통 작가들에게 단기간의 괄목할 만한 효과를 요구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사실 언제나 장점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데, 조건 없는 지원이 작가를 현실에 안주하게 하면서 자생력을 잃게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틀리에 지원 작가에게 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부분에는 매우 신중하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각자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해 나가는 것 자체가 사회 환원일진데, 또다시 다른 형태의 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것은 아직도 예술창작의 의미와 사회 안에서의 예술가의 위치에 대한 인식 부족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과의 소통을 여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회 환원이라는 화두에 접근할 수는 있겠으나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만큼 내놓으라는 식의 단순 접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생적 아틀리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 역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일원화된 형태로 결정되어 지원하게 되는 시스템은 기존에 자체적으로 이루어놓은 자생적 기반을 손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술가들 스스로가 연대하여 실제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틀을 만들고, 여기에 적절한 공적 지원이 동반되는 형태 역시 보다 효율적이고 적절한 예술가 아틀리에 지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화랑 큐레이터로 재직 중 도불, 프랑스 에꼴 뒤 루브르 박물관학 3기 학위, 아비뇽 대학교 언론정보학 박사학위 및 몬트리올 퀘벡대학교 박물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파리4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대학원에 출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