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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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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인이
바꾼 예술史

적당한 고독

글 최영미 시인

예술가로 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아티스트가 아니더라도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내 주위에는 쉰 살이 지났는데도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전공을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시간 강의를 하거나 미술 동네 근처에서 어찌어찌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대학이나 미술관에서 자리를 잡은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개는 비정규직에 종사하지만, 이들의 눈은 맑고 초롱초롱 빛나며 몸에서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젊은 시절 자신이 품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얼굴에 붙어있는 그들을 만나고 올 때,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그들을 지탱하는 것일까? 왜 A는 진작에 다른 (실속있는) 직업을 구하지 않았을까. 실속 없기는 시인인 나도 마찬가지. 언젠가 A와 처지가 비슷한 B와 식사를 하며 “왜 우리는 가난한 거지?”라는 푸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말했다. “그 대신 우리는 재미있는 공부를 했잖아.” 그래, 근데 재미가 밥 먹여주니? 애초에 내게 온 원고청탁의 취지를 살려 청년예술인을 격려하는 글을 쓰려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가슴 뛰는 예술을 찾는 청년예술인

‘청년예술인’이라니. 무릇 진짜 예술가는 모두 청년 아닌가. 생물학적인 나이는 늙었지만, 펄펄 살아있는 작품을 생산했던 화가들.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가장 ‘젊은’ 미술가는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이다.

나이 오십에 이르러 “나는 어느 화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떤 교회에도, 어떤 제도에도 어떤 아카데미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천명한 반역아. 스위스와 접경지대 마을인 오르낭 출신으로 이렇다 할 미술학교의 저명한 선생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고, 루브르미술관의 그림들을 보고 베끼며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는 내가 가르쳤다’고 자랑하던 그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뒤를 봐주는 스승 대신에 그에게는 함께 ‘혁명’을 꿈꾸던 친구들이 있었다.

구스타프 쿠르베 作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1842,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소장)

23세에 그린 자화상

쿠르베와 보들레르가 만든 청년예술의 집결지

파리의 술집에서 보들레르 프루동 등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그는 사회주의를 배웠고, 새로운 미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확신에 찬 전위예술가로 거듭났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미술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해야…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라는 쿠르베의 유명한 명제는 그보다 2살 아래의 시인 보들레르의 “현대 화가의 주제는 빠르고 즉각적인 현대 삶의 인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선언과 일맥상통한다. 파리의 라틴 구역에 있는 쿠르베의 스튜디오와 가까운 술집(Brasserie Andler)은 나중에 ‘리얼리즘의 신전’으로 불리며 보헤미안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화가 쿠르베와 시인 보들레르의 우정은 미술의 역사를 바꾸었다. 젊은 예술가의 삶은 평탄치 않다. 맑게 개다가도 언제 비바람이 칠지 모른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지인들이 주위에 있어야, 힘든 나날들을 견디고 자기 확신을 잃지 않는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라고 나는 믿는다.

구스타프 쿠르베 作 〈화가의 아틀리에〉 (1854~1855,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길이 6m, 높이 3.6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대작. 가운데 화가 쿠르베의 모습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시인 보들레르를 비롯한 비평가, 수집가, 학자 등이 있다. 왼쪽으로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부 등의 모습을 그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표현하여 당시 사회의 모습을 알리려 했다.

쿠르베, 현실과 타협을 거부한 예술가

쿠르베가 스무 살 무렵에 그린 자화상 〈절망한 남자〉를 다시 보았다. 당시 그를 짓눌렀던 가난과 고독이 배어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만만한 젊음이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노려본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나는 털끝만치도 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순간이라도 나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누구를 만족시키거나 보다 쉽게 팔기 위해서는 한치라도 그리지 않으면서 나의 예술로 밥을 먹기를 희망한다네.”

쿠르베의 편지를 다시 읽으며 나를 돌아본다. 쿠르베처럼 나도 한때 타협을 혐오했었는데….
그처럼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면 요즘 세상엔 살아남을 수 없다. 권력 앞에 고개 숙이지 않으며 스스로 ‘프랑스에서 가장 거만한 사람’이라 일컬었던 쿠르베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고, 결국 스위스로 망명해 술독에 빠져 살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적당한 고독, 적당한 여유

쿠르베와 달리 들라크루아(Delacroix, 1798-1863)는 나름대로 사교에 능했던 화가이다. 고독을 추구하지만, 친구에게 자신을 맡기기를 좋아했다.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들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부와 명예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

가난과 고독은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믿던 시대는 지났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예술이 나온다. 적당히 고독해라. 너무 고독하면,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또라이가 되거나 일찍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