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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7

20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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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고도 안전한 세상을 위하여

이은의 변호사



존재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의 공론화 열풍은 문화예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화예술계에서의 미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문화예술계는 일반적인 직장과 비교할 때 좁고 폐쇄적이다. 피해자가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관리감독자 지위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업계 선배를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면 당장에 서 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앞으로 설 자리까지 위협받을 각오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많은 피해자가 용기 내 피해를 공론화했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말하기도 쉽지 않고 거부하기도 쉽지 않다.


다수의 사람이 공존하는 속에서 성폭력의 발생이나 발생할 개연성을 100% 근절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들이 일상화되는 것을 막고 발생 빈도를 최소화하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무엇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만 지웠는지, 피해가 발생한 과정이 비슷한 여러 사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피해가 발생한 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러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각 악단 내에서 발생해 공론화된 성폭력 사건을 맡았던 경험이 있었다. 가해자는 각 악단의 대표나 지휘자 등 채용과 고용유지의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들 대개가 가해자 밑에서 업무를 하던 중 피해를 입었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피해자를 만졌고, 누군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피해자를 만졌다. 어떤 성폭력은 기습적으로 일어나거나 완력으로 행해졌지만, 어떤 성폭력은 피해자 스스로 감내하거나 협조하도록 종용되었다. 대개의 사건에서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 외에도 같은 가해자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공론화 후 본격적인 다툼에 들어간 후엔 내부자로부터 증언을 받기 어려웠다. 심지어 감독이 가해자였던 영화계 성폭력 사건을 하면서는 피해가 발생한 시기에 가해자·피해자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배우나 스태프 등 다수의 사람이 감독을 위해 진술서나 탄원서를 쓰고 법정에 나와 증언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는 순간이나 피해를 알리기까지 혼자 마음앓이를 하다가 사건이 공론화되면 세간의 관심 위에 놓이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시끄럽게 불거졌던 사건이 이내 조용해진 후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미미했고 심지어 되지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박수 보냈던 피해자가 낸 용기는, 가해자가 처벌받을 위기에 놓이며 소속된 집단 안에서 스승이나 선배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 수순이었다. 가해자는 피해가 발생했던 자리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 자리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경악할 노릇이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러싼 조직이나 업계에는 잘못된 학습이 누적되었다. ‘말해봤자’가 현실이 되는 순간, 피해자는 후회하고 집단의 문화는 후퇴한다.


이쯤에서 지난 몇 년간 공론화돼서 알려진 사건들에서나마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았는지, 무엇이 가해자를 벌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윤택과 같이 형사처벌로 이어진 경우도 있지만,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저명한 시인도, 해외영화제에서 화려한 수상이력을 뽐냈던 영화감독도, 여배우의 노출 영상을 임의로 영화 안에 삽입해 거액을 번 영화감독도, 신문 지상에 오르던 각종 지자체의 감독자나 지휘자도, 다수의 피해자가 신고에 나섰던 한류스타도 관련해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누군가는 죄 없음을 변소했고, 누군가는 자살로 책임을 져버렸다. 심지어 미성년자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가해를 하고 거기에 기대 오히려 가짜 미투의 희생양 코스프레를 한 문인도 있었다.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법이 미치지 않는, 오래되거나 증거가 부족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을 사과하게 만들고, 섰던 자리에서 잠시나마 밀어낸 것은 세상의 눈과 입이었다. 가해자들은 사람들의 평가로 빛났던 자리에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자리로 내려왔다. 그들에게 충분한 벌이 되었는지를 고려해 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인지는 역시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로 남았다.


한편 그나마 일정한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만큼이나 소속되기 위하여 또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도 많다.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 운영이 도제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보니 사실상 권력이 쉽게 사유화되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당장이든 앞으로든 피해자의 목줄을 가해자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는 쉽게 죄의식이 없어진다. 심지어 가해자 상당수가 성폭력을 저지르며 이를 예술인의 기행이나 취향 같은 것으로 합리화한다. 이를 버젓이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형국에서 피해자는 움츠러든다. 일정 집단에 편입된 피해자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편입될 기회나 일할 기회를 바라는 피해자들에게 이런 상황은 더 위태롭게 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테제는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계에서 미투가 되풀이되지 않겠는가’가 아니다. 법으로든 세상의 눈과 입으로든 성폭력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야말로 성폭력을 근절하는 최선의 예방책이 된다. 피해자들이 피해에 내몰리게 되는 저간에는 공정한 기회 부여에 대한 결핍과 불신이 전제되어 있다. 가해자가 업계 일상으로 복귀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피해자의 ‘당연한 일상’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 위협은 가해자가 단순하게 피해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제거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가 업계의 진입이나 집단에의 선발, 고용의 유지, 시현 기회의 배분 등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체계를 갖추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통해 투명성을 갖출 때 줄어들고 사라질 일이다. 그러니 고민해야 할 지점은 거꾸로 ‘어떻게 해야 문화예술계에서 미투가 이어질 수 있을까’다. 피해가 알려진 후 사람들의 비난과 감시의 눈초리가 여전히 거셀 때,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는 것이 피해자의 삶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때, 문화예술계 모두가 조금 더 안전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