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로고 예술인 로고 모바일 예술인 로고 모바일

vol.33

2019. 8

menu menu_close menu_close_b
구독 신청
닫기
구독신청
칼럼
계약의 기술, 혹은 예술

글_최영미(시인/이미출판사 대표)

“1층에서 10층으로 올라가려고 변변찮은 지팡이에 의지해, 붕괴 직전의 예민한 신경을 끌고 시장에 나가 장사꾼들과 흥정한다”

몇 년 전에 내가 쓴 「계약」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지금 다시 보니 ‘장사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내가 사업자등록을 하고 출판사 대표가 될 줄은 몰랐다. 사업자인 나는 요즘 다른 사업자들과 흥정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예술가도 사업자라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과거에 나는 자신이 개인사업자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고, 계약에 서툴렀다. 딱딱한 계약서 읽기를 싫어했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도장을 찍을 때의 긴장을 싫어했다. 언어에 활자에 민감한 직업이라 출판계약서나 전월세계약서를 내 딴엔 꼼꼼히 읽기는 했지만, 지나고 보면 사소한 문구에 신경 쓰느라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곤 했다.

성공한 사람만 아니라 실패한 사람에게서도 우리는 무언가 배울 게 있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저지른 황당한 실수들을 여러분은 피하시기를 빌며 경험담을 조금 늘어놓겠다.
1994년에 첫 시집을 출간할 때, 나는 C출판사와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당시엔 그런 관행이 아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인이었던 나는 C출판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두 번째 시집 이후에 내가 출간한 책들은 계약서를 썼다. 내 글이 해외에서 번역되거나 노래나 영화로 만들어질 경우에 이익의 분배 비율에 집착해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나는 바보였다. 6:4를 7:3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해 내 의지를 관철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출판사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담당자를 피곤하게 해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나는, 내게 불리한 결과를 낳았던 것 같다.

나의 충고

1 계약서를 쓰되 계약서에 너무 얽매이지 마라. 비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출판사 대표나 편집자가) 내 책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가 더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실력보다 인간관계가 성공을 좌우한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내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책은 내주더라도 그 책이 잘 될 리가 없다.

2 계약서는 계약 당일에 가서 읽지 말고, 미리 이메일로 초안을 보내 달라고 하라. 집에서 혼자 천천히 검토하며 금액은 물론 지급 시기, 계약 기간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계약 당일에 옷차림은 너무 분방하지 않게 약간 격식을 차려입는 게 좋다. 예술가가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신경 쓰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옷차림이 제멋대로이면 행동도 제멋대로인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3 약간의 예외는 있겠지만, 계약 기간은 짧을수록 예술가에게 유리하다. 상대방과 뜻이 맞지 않아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데, 계약기간이 길어서, 5년 10년 마냥 기다려야 한다면 얼마나 속이 터질 일인가. 출판 계약의 경우, 초판 5년에 이후 5년마다 (쌍방의 해지의사 표시가 없으면) 자동으로 연장하는 게 업계의 상식인데, 내 생각엔 너무 긴 것 같다. 3년으로 하되 그 뒤는 1년마다 해지가능하게 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보기 싫은 표지를 어떻게 5년을 참나.

4 큰돈이 걸린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계약서를 생략하고 이메일로 대신해도 된다. 일을 할 때마다 무조건 계약서를 쓰자고 덤비지 마라. 계약서보다 이메일이 열람도 쉽고 관리도 편리하다.

5 계약서들을 종류별로 수납해 기억하기 쉬운 곳에, 생각나면 꺼내보기 쉬운 곳에 두시길.

6 A라는 거래처와 관계가 좋다고 A만 믿고 따르지 말고, 거래선을 다양하게, 적어도 두 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길. 지금 해가 쨍쨍하지만 언제 천둥번개가 칠지 모르니, 전속계약이나 너하고만 작업한다는 내용의 배타적인 계약은 하지 마시길.

7 내가 먼저 아쉬워 계약할 때보다, 그들이 내게 먼저 제안할 때 내 몸값을 더 높일 수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제안을 한다면,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8 얼마를 줄지를 처음부터 밝히지 않고, 돈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작품을 의뢰하거나 강의를 부탁하면 정중히 거절하라. 강연을 요청하며 강연료를 말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다. 돈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 마라. 언젠가 미지급 원고료를 받으려 신문사에 전화했는데 “시인에게서 이런 (돈 달라는) 전화 받고 싶지 않다”는 기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인이 시시하게 돈 이야기하지 않게 당신들이 미리미리 챙겨줘야지!

9 거절할 때는 가능한 부드럽게, 상처받지 않게 거절해야 뒤탈이 없다.

10 배가 고파야 예술을 한다는 말은 믿지 마라. 배가 고프면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창의력도 감퇴한다.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하며 예술가로 살아가려면, 돈이 있든가 후원자가 있어야 한다. 월세를 걱정하며 어떻게 긴 호홉의 장편소설을 쓸 것인가. 계약의 기술 혹은 계약의 예술에 정통해야, 예술가로 대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