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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인사 예술인에게 전하는 안부

희망일터와의 소중한 만남,
“우리는 예술로 편견을 바꿔갑니다”

2018. 6
희망일터와의 소중한 만남,
“우리는 예술로 편견을 바꿔갑니다”
희망일터: 황도연, 강덕중, 김보람, 류미례, 문정현

2017년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퍼실리테이터 황도연(음악), 참여예술인 강덕중(영화), 김보람(영화), 류미례(영화), 문정현(영화) 씨는 인천 강화군 화도면의 ‘희망일터’에서 만났다. 도정공장과 식혜공장에 정신장애인을 채용하여 쌀과 식혜를 생산·판매하는, 정신질환자 직업재활시설 희망일터는 브랜드를 강화하고 조현병을 바로 알리기 위해 예술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3명의 다큐멘터리 감독과 1명의 작곡가, 1명의 배우는 희망일터 조현병 회원들의 긍정적 사회참여와 변화 유도를 이끌 수 있는 활동 및 희망일터 내에 예술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그렇게 모였다.

그들은 조현병, 정신장애에 관한 대중들의 부정적 인식을 제고하고 조현병 회원들의 긍정적 사회참여와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보통 참여예술인들이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기간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이번 경우에는 그해 연말과 그 이후까지 이어졌다.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연재를 시작하면서 스토리펀딩 내용으로 희망일터 회원들과 함께 6개월간 ‘즉흥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연말까지 스토리펀딩 연재에 정신장애 회원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타자로 존재하던 그들을 이웃처럼 가깝게 느끼게 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은 조현병이나 정신장애에 대해 부주의하게 언급함으로써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을 죄인처럼 숨죽이게 합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 정신장애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최종적으로 희망일터 회원들은 숙명여대 앞 한국 즉흥극장에서 공연하면서 세상 앞에 나섰다.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스토리펀딩은 111건 펀딩 참여, 총 1,211,000원으로 완료했다. 목표액을 채우진 못했지만 황도연, 강덕중, 김보람, 류미례, 문정현 씨에게는 특별하게 남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려 깊게 준비한 공연이 끝났을 때 무대에 섰던 이들 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했던,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를 그 말, “잘했어. 정말 잘했어!”. 공식 일정 이후에도 희망일터에 휴게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을 지속한 다섯 명의 예술인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한다.

회고전, ‘화백, 종로를 걷다 그리다’로 다시 만나다 작가 최낙경

2017년 77세의 일기로 별세한 최낙경(1943~2017) 씨는 프랑스 독일, 헝가리, 일본, 미국 등에서 다수의 전시를 개최하며 서양화가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80년대 신문연재소설 삽화작가로도 유명했던 최 씨는 광복 후 제2회 목우회 공모전 수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열정적인 작업을 이어가면서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외에도 작고하기 전까지 목우회 고문 및 자문위원 신작전회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만에 아들 최선 작가의 주도로 회고전이 열렸다. 지난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탑골미술관 제7회 기획초대전으로 진행된 ‘화백, 종로를 걷다 그리다’에서는 최 씨의 작품을 단순히 전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화백의 생전 고민과 감정이 녹아 있는 낡은 이젤, 다 쓴 물감이 잔뜩 쌓인 상자, 얼룩진 삼각 간이의자 등의 유품과 미술도구도 함께 전시되었다.

최 씨의 삶의 궤적을 더 깊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전시 기획은 아들 최선 작가가 어쩌면 끝나지 않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연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획전 전에 아버지의 작품 천여 점을 보관 중이던 창고의 화재로 최선 작가는 화가이자 아들로서 큰 변화를 겪었다.

최 씨는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의 참여예술인이기도 했다. 최선 작가는 “아버지는 창작지원금과 의료비 지원을 받았다. 재단의 복지 개념이 예술인의 최소한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지키는 데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 역시 그것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씨의 생전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은 그가 집중해 작업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한국의 사계절을 옮겨놓은 듯한 그의 대표작 50여 점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전시실 한쪽 공간에는 그가 1983년부터 매일경제신문,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 주요 일간지 연재소설에 그린 삽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소월시 목판화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한 최낙경 씨. 초기작 ‘자화상(1978)’과 생애 마지막으로 담은 ‘자화상(2017)’ 속 그의 변화처럼 우리 기억 속 그도 달라질 것이다. 그가 화폭에 담은 아름다움만이 부드럽게 굳건했다.

  • 캔버스 유화 <목표 사생 1997>, 탑골미술관
  • 아들 최선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플랫랜드, Flatland〉 전시 중이다. 금호미술관
마지막까지 예술인으로 살다 가수 금사향

1940~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금사향(최영필, 89) 씨가 향년 89세로 5월 10일 오전 4시 15분 세상을 떠났다. 1929년 평양 출생으로, 본명은 최영필. 금사향은 ‘거문고를 울려서 나는 교향악’이란 뜻으로, 거문고 실이 울리는 소리처럼 낭랑한 금 씨의 목소리를 두고 작사가 고려성 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19세에 상공부 섬유국에서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금 씨는 1946년 주위 권유로 전국 가수 선발 경연대회에 참가, 당시 조선 13도 대표들과 우승하면서 삶의 방향을 틀게 된다. 같은 해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재 KBS) 전속가수 모집에 합격해 전속가수 1기생으로 활동했으며 ‘첫사랑’이란 곡으로 정식 데뷔했다. 재치 있는 입담으로 주위에서 만담이나 영화배우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오직 가수이기만을 고집했던 금 씨는 ‘홍콩아가씨’, ‘님 계신 전선’, ‘소녀의 꿈’ 등을 발표하며 1940년~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우뚝 섰다.

금 씨는 전쟁 중 ‘님 계신 전선’을 부르며 최전방까지 위문공연을 다녔다. 특히 공연 도중 사망하더라도 국가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10cm 하이힐을 신고 전장 무대를 누볐다. 시대상을 반영한 곡으로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상흔을 달랬던 금 씨는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 거리’로 시작되는 ‘홍콩아가씨’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피난 시절 부산에 설립된 도미도테코드사에서 54년 취입한 ‘홍콩아가씨’는 당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된 사교춤 보급과 함께 대중화된 우리나라 사교춤 노래 1호이기도 하다.

전성기 이후 금 씨가 예술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노년에 어렵게 생활한 점 등만이 주로 부각되는 등 정작 금 씨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음악적 열정은 주목받지 못했다. 금 씨는 2014년 복고클럽(원로 대중예술인들의 활동무대를 마련하고 지역시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사업. 예술인복지재단과 콘텐츠진흥원 주최)에 참여해 무대 위에 섰고, 2017년 예술인복지재단 창작준비금을 받는 등 예술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70여 년 동안 내가 녹음했던 곡들을 다시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다.
(…)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참 멋있다.
희망에 속아 살았지만 아직도 희망이 좋다.”

고령의 나이에도 한 달에 네 다섯 차례씩 전국을 누비며 공연무대에 서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구전가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동영상 녹음작업을 해온 금 씨는 창작준비금 지원 후 밝힌 소감에서 “예술인이라는 자부심”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평생 예술활동을 이어온 예술인이 “나라에서 예술인을 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라고 할 때의 감정은 특별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고 싶다”던, 평생을 예술인으로 살아온 금사향 씨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