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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사색 예술인과 역사: 68혁명 50주년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

2018. 12
글 김지승

지난 5월, 68혁명 50주년을 맞은 프랑스 파리의 풍경은 사뭇 비장했다.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 걸까. 1968년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던 거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68혁명!” “68년 5월, 그들은 기념하고 우리는 계승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반정부 시위 물결을 이뤘다. 50년 전 드골 대통령을 향했던 비난이 시차를 넘어 마크롱 대통령에게 향했다. 그러나 역사는 달리 반복된다. 2018년 5월에는 68혁명의 생동감과 모든 것을 전복할 것 같았던 젊음이 없었다. 20%까지 치솟은 청년 실업률은 젊음들에게 그때와는 다른 절망감을 안겼다.

  • 바티클랑 극장 인근에 뱅크시가 남긴 작품 바티클랑 극장 인근에 뱅크시가 남긴 작품

한 달쯤 후 68혁명의 저항과 사회비판 정신을 기리는 그라피티(graffiti)가 파리 시내에 번졌다. 서명을 남기지 않은 이 거리 낙서의 주인을 두고 잠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얼마 후 작가가 직접 목소리를 냈다. 영국의 거리예술가 뱅크시(Banksy)*였다. 그의 그라피티에 단골로 등장하는, 멸시 받는 인간을 상징하는 쥐가 이번에도 소르본대학 인근 등에 등장했다. 난민 소녀가 나치 문양 스와스티카를 스프레이로 칠해 꽃무늬로 바꾸는 모습을 그린 작품은 2017년에 프랑스 정부가 철거한 난민센터 인근 건물 벽에 그려졌다. 난민 문제에 보수적으로 대처하는 프랑스 사회를 비판한 이 작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 또한 2015년 파리 연쇄테러로 90명의 희생자가 생긴 바타클랑 극장 인근 건물에도 추도의 그림이 남았다.

*영국의 얼굴 없는 예술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그라피티를 세계 곳곳에 남기고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68 정신’이‘68 예술’로
  • 현실을 벗어난 예술을 다시 현실로

뱅크시가 형상화한 환대받지 못하고 멸시 받는 이들, 난민, 신전체주의, 테러리즘 등 세계화된 문제들은 68혁명과 우리 사이에 50년이 맥없이 흘러버렸음을 뼈아프게 자각시킨다. 확연한 변화는 변화대로, 굳건한 변화 없음은 그것대로. 1968년 5월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 다양한 층위의 불평등 구조를 탐구하고 반발했던 프랑스 학생운동 진영은 노동자들과 결합했다. 함께 광장으로 나온 다수의 시민들로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새롭고 놀라운 언어들이 혁명을 정점으로 이끌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 “지루함이야말로 반혁명이다.” “도망쳐라,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쫓고 있다.” 등 기성질서를 거부하고 해체하려는 욕구는 새로운 언어를 불러냈다. 그런 언어로 학생들이 만들었던 선전지가 현재 일간지로 나오고 있는 리베라시옹(Liberation)이었다. 당시 발행인은 사르트르였다.

혁명은 정치권력 획득에 실패하면서 일상을 바꾸려는 일상투쟁으로 나아갔다. 이후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불복종으로 광범위하게 퍼졌고,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개념과 실천이 이어졌다. 모든 걸 계급으로 환원하던 좌파를 한 발 더 진보시킨 신좌파는 평등주의를 재창조했다. 요즘의 정체성 운동,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된 것도 이때다. 이전에는 ‘모든 사람의 문화’를 표방하면서 고급문화에 대중 접근성을 높이려고만 했다면, 혁명 이후에는 이전 엘리트 중심주의 문화를 비판하며 ‘모든 사람에 의한 문화’에 집중했다. ‘민중공방’**이나 ‘발뢰르반 강령’***은 예술작품들의 위계와 사회계층 간 격차를 해소하고 모든 사람에 의한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시도들이었다. 이렇듯 정치화된 예술은 각성된 대중과 함께 ‘68 정신’을 이어갔다.

**국립미술학교와 장식미술학교에 구축. 혁명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선정적이고 유희적인 포스터 제작으로 혁명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다. 예술 및 예술가의 폐쇄성을 허물고 민중미술을 정립하기 위한 문화 혁명론을 펼쳤다.
***연극 장르에서 국가 주도의 문화 정책과 문화기구들을 부정하고 일반 대중을 위한 일반 대중에 관한 연극 개념을 창출해낸 선언서

전통적인 가치관의 도덕과 금기를 전복하는 도발 행위, 규칙 파괴, 과학적 합리성에서 감수성 해방, 자본과 현실 원칙이 억압한 상상력의 자유, 욕망의 자유, 쾌락의 자유… 신좌파의 문화 혁명적 요소, 미학적 저항 원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68 예술’은 전 세계로 번졌다. 거기에 인종·계급·젠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녹아들면서 다양한 하위문화가 탄생했다. 나라마다 시차가 있긴 해도 당시 전 세계가 혁명의 흐름을 탔다.

68년 이전과 이후, 예술로 연결되는 혁명

60년대 이전까지 고급문화와 그 반대문화로 양분되었던 문화는 다원화되고 다양한 하위 언어들을 포함하면서 복잡해지고 풍요로워졌다. 1960년대 후반은 미국의 히피 문화, 자메이카를 위시한 카리브 지역에서의 레게 문화, 영국에서의 펑크 문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가 분출한 시기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68혁명의 영향 안에서 열렸다. ‘치카노 벽화 운동’도 같은 흐름 속에 위치해 있다.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긍정과 정치적 자결권을 확보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었는데,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1978)’란 제목의 공동 제작 그라피티 안에서 정면으로 사람들을 응시하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한동안 여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파리와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들이 세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또 어떤가. 전까지 권위적인 강의만 있던 대학에 세미나 수업이 생긴 것도 68혁명의 영향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대학의 무상교육도 68의 결과이며, 프랑스 현대 샹송의 진정한 출발점도 68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 퍼진 후 미국과 남미까지 진출한 혁명의 공기는 1969년 일본 적군파와 전공투까지 가닿는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이 세계적인 혁명의 흐름이 뚝 끊긴, 단절된 장소인가 아니면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혁명의 공기가 스며든 땅인가. 의견은 나뉜다. 강력한 군사 정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신좌파 운동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없었을 거라는 의견과 당시 청년 세대의 장발, 청바지, 통기타, 포크 음악의 향유는 혁명의 영향을 받은 거라는 분석 모두 반박의 여지를 안고 있다.

영향의 유무야 어쨌든 68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여성운동, 소수자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논의와 합의의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정신과 예술의 선순환 과정에서 말하자면 상상력에게 권력이 필요한 때. 50년 전에도, 또 그 전에도 인류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세계의 문을 열어젖힌 건 바로 그 상상력이었다.

어떤 억압도 넘어서겠다는 저항과 낙관의 표현들

68혁명은 언어의 축제였다.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벼려낸 구호와 표어, 주장이 민중미술의 화풍과 만나 강렬한 이미지의 포스터와 현수막이 되기도 했다. 당시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의 기억에는 모든 사람이 새롭게 발견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큰 놀라움으로 남아 있었다. 5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는 68혁명 당시 포스터와 표어들을 파리 국립미술학교 전시관에서 ‘투쟁의 이미지들’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혁명을 하게 된다.”
“혁명적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 행동만이 있을 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