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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칼럼 김서령 소설가·번역가

‘빨간날’만 소설가

2018. 12
빨간날만 소설가

압구정의 R호텔 지하 바(Bar)에 나는 발렌타인 21년산을 스무 병이나 결제해두었다. 고객들이 언제든 바에 들러 한 잔씩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호텔에는 피부관리실도 있었는데 나는 해마다 스무 장씩 연간회원권도 준비했다. VIP 고객들에게 연말 선물로 보낼 것들이었다. 더 화려하게, 더 고급스럽게 나는 VIP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를 궁리했다. 파티를 열었고 그럴 때면 나도 이브닝드레스가 필요해 외국에 나갈 때마다 한 벌씩 사들이는 습관이 생겼다. 한국에서는 가격이 턱없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꺼내 입는 드레스들이 망가질까 봐 나는 드레스를 위한 옷장을 따로 준비했다. 그 모든 일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일어났다.

빡빡한 닷새를 보내도 나는 토요일 이른 아침이면 잠에서 깼다. 평일 내내 미뤄두었던 집 안 청소 때문이었다. 후다닥 청소를 끝낸 뒤 커피 한 잔 끓여 책상 앞에 앉으면 이제 소설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평일과 주말을 딴사람처럼 사는 중이었다. 소설 속 내 주인공들은 파티 따위 모르는 이들이었고 가난하고 고단하고 쓸쓸했다. 나는 그런 이들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소설을 쓸 시간이 내내 부족했기 때문에 주말에는 그 어떤 약속도 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그렇다 해도 크게 절망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려니 생각했다. 소설이 나에게 줄 가난에 대해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소설가 지망생, 시인 지망생들로 득시글한 문예창작학과 4년 내내 어쩌면 학습된 것일는지도 몰랐다. 가난해도 괜찮지? 그래도 글을 쓸 거지? 그래서 슬프지도 않았다.

내 두 모습이 충돌을 했다면 그건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종종 소리를 쳤다. (떼를 썼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지만)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 쓰는 작가가 되고 말겠어! 회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작가로만 살래!” 나를 눌러앉힌 건 소설가 선배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지 네가 몰라서 그래. 혼자서 방구석 장판 무늬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써제끼는 작가가 될 거야? 제발 사람들 사이에 있어.” 수긍하기 싫었는데 나는 자꾸 수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 쓰는 작가가 되겠다며, 회사 따위 그만둬 버릴 거라 하소연하는 후배들을 말리는 선배로 자랐다. “가난이 너를 좀먹게 하지 마. 외골수가 되어 처박히지 말라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 건 실은 가난이 무서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나 서점 직원이 될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한 적이 많았다. 그랬다면 내 두 개의 삶이 이리 따로 돌진 않았을 텐데. 동료 작가들에 비해 내가 덜 우아한 것 같고 덜 절실한 것 같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곤 했다. 결국 겁도 없이 덜컥 사표를 내던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아주 다른 삶이 찾아왔다.

소설을 쓰는 한 선배의 작업실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단다. ‘잡문은 한 시간 내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많이 웃었다. 전업작가이지만 소설만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하니 다른 글이라도 써야 하고, 또 그 다른 글에 치여 소설을 제대로 못 쓰게 되면 안 되니 소설을 제외한 다른 글은 모조리 잡문으로 취급하되 한 시간 안에 끝내버린다는 각오. 그래, 나도 그렇게 살면 될 거야. 어찌 되었건 ‘쓰면서’ 살 거야. ‘쓰기만 하며’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한 애송이 같은 발상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이들의 월급만큼 돈을 벌기 위해 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을 썼다. 우선 한 일간지에 나는 일일칼럼을 연재했다. 말 그대로 매일 쓰는 칼럼이었다. 일요일 하루만 빼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사람들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니, 어떻게 매일 칼럼을 써? 그게 가능해?” 가능했다. 펑크를 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감히 일간지에 펑크를 낼 만한 배포를 가진 작가가 있을까?) 그리고 한 웹진에 주 1회 에세이를 연재했고 책 칼럼은 월 1회였다. 여행잡지에다 월 1회 여행에세이도 썼다. 그러니까 한 달에 고정 연재만 서른 편 정도였고 그 외에 부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청탁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번역서도 두 권 출간했으니 나는 농담처럼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정말이지 이제 영혼이 탈탈 털려버렸어. 쓸 것이 더는 없어.” 물론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에게는 아기가 생겼다. 세상 엄마들 다 그렇듯 나도 공백이 생겼고 아기가 36개월이 되어서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한참 늦게 들어간 어린이집에 아기는 아침마다 제 등짝을 다 덮는 가방을 메고 총총총 걸어간다. 그 모습은 언제 보아도 우습고 귀엽다. 나는 아기의 뒤를 따라 걷는다. 나 역시 가방을 멨다. 출근을 하는 길이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아직 서툰 아기의 뒤치다꺼리를 거듭 부탁하고 나는 지하철을 탄다. 마을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내리면 도서관이다. 내 새 직장이다.

슈트를 챙겨 입을 필요까지는 없어서 나는 무릎을 덮는 스커트에 도톰한 스웨터를 입거나 청바지에 셔츠 정도로 끝낸다. 구두를 신어야 하나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나는 구두를 싫어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꼭 구두를 신어야 하는 날이면 가방 안에 구두를 챙겨 넣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여자가 되었다. 다행히도 도서관 사람들은 나에게 구두 따위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죄책감 없이 운동화를 신었다. 목에다 직원증을 걸고 서가를 돌아다니는 일은 꽤나 즐겁다. 서가에는 내 책도 있는데 꽤 낡았다. 사람들이 많이 빌려 가서 낡았다기보다는 그냥 시간에 저절로 묵은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이 책을 좀 더 수월하게 골랐으면 하는 마음에 작은 컬렉션을 꾸리고 한 장 한 장 손글씨로 소개글을 쓴 책갈피를 책장 사이에 끼워 넣는다. 뭉클한 성장소설만 따로 모은다거나 웃겨죽을 것 같은 책들만 따로 모은다거나 가을에 읽기 적당한 시인들의 에세이만 따로 모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업무는 아니지만 마케터 출신의 내가 그저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다.

도서관에 다녀도 역시나 소설은 빨간날에만 쓴다. 그러니 마케터였을 때에도, 전업작가랍시고 들어앉아 칼럼만 죽어라 썼을 때에도,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희한하게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내 소개를 할 때 나는 언제나 “소설가예요” 대답하지만 소설가라는 직업이 나에게 밥을 준 적은 없다. 가끔 그 사실이 혼자 생각해도 기가 막혀 나는 풉풉 웃는다. 생애의 한 주기가 지나가고 다음, 그러니까 다음 세대의 소설가들이 어찌 살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시대의 소설가는 다들 가난하고 말겠지. 가난하지 않으려고 다른 일을 하겠지. “예전에는 말이야, 예술가들이 가난했었어. 소설이 돈이 되지 않던, 그런 야만의 시대가 있었어”라고 말을 하면 “설마! 그랬을 리가! 믿을 수 없어!” 탄식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 김서령 소설가·번역가 1974년 경북 포항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티타티타』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
    번역서 『빨강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두 번째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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