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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7 2018. 10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대화 예술인을 만나다
이산(배우·여성주의 상담가)

불편해도 전해야 하는 말과 몸짓들

2018. 6

어떤 시에서 예술가를 두고 “아주 먼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숨소리를 잘 듣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걸 본 적이 있다. 모든 예술가가 그럴 리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때로 정말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안심한다. 듣는 사람.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숨소리를 듣는. 이해와 소통의 기호로서 숨소리가 환기하는 점은 타인 역시 나처럼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너무 자주 그걸 잊게 하는 세상에서 판토마임 배우이자 여성주의 상담가 이산 씨는 누구보다 정성껏 듣는 사람일 것이다. 글·정리 김지승, 사진 이현석

인터뷰

문화예술계 미투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다수의 목소리 안에도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 200여 명 앞에서 성폭력·성희롱 예방 강의를 진행한다는 건 그 차이에 의한 상호 긴장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5월 10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있었던 〈2018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참여예술인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이산 씨는 참여예술인 직무교육의 일환으로 진행된 ‘문화예술계 성폭력·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로 참여했다. 이산 씨가 강의를 위해 마이크를 잡는 순간 예상대로 묘한 팽팽함이 느껴졌지만 강연이 진행되면서 공기는 조금씩 느슨해졌다. 30분 남짓 이어진 강의가 마무리될 즈음 듣는 모두가 웃으면서 유쾌하게 들을 수 없는 주제임이 분명한 이야기를, 그러나 꼭 필요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때 필요한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 상담팀에서 활동 중인 이산 씨는 2017년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에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한 배우이기도 하다. (이산 씨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상담과 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각각을 시작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 상담팀에서 일하게 되면서 성폭력 상담을 시작했어요. 상담소 퇴사 후 극단 ‘목요일오후한시’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배우로 활동하게 되었고, ‘목요일오후한시’에서 함께 공연하던 동료를 통해 ‘스튜디오QDA’를 알게 되면서 판토마임을 시작했습니다.

양현경과 이산, 두 이름으로 살고 계십니다. 상담가 정체성과 예술인 정체성이 부딪히거나 화해하는 경우가 있나요?

그런 경우는 잘 없습니다. 미투운동이 활발해지고 연극계에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교육이나 상담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났어요. 우연히 일손을 보탤 계기가 생겨 이전에 일했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잠시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폭력을 줄이는 데 동참할 수 있다면 언제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공연자 중 한 명일 뿐이고, 이 점은 상담활동을 하기 전이든, 상담활동을 마무리한 이후든 변함이 없어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지원 사업에 참여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언제, 어떤 활동을 하셨고, 활동 후 소감은 어떠셨나요?

2017년에 ‘부천 여성의 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에 퍼실리테이터로 매칭되어 활동했습니다. 상담원으로 활동하시는 상근활동가와 자원활동가, 후원회원을 만나 그림 그리기, 시 짓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기관의 초대 회장님부터 현재 회장님까지 한 분 한 분 모셔서 영상인터뷰를 한 뒤, 인터뷰를 통해 기관이 걸어온 길을 짧게나마 볼 수 있는 영상을 제작했어요. 함께 일했던 참여예술인들이 그동안 작업을 통해 쌓아온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해주시고 서로의 일도 기꺼이 협력해서 해주셨어요. 기관 활동가분들, 참여예술인분들과의 만남이 모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서로 알고,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활동 배경과 작업 성향이 달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한 예술인의 피해 대응 아닌, 가해 예방교육이 필요하다는 제언
알면서도 실행해보지 못한 의견 소중해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과 관련해, 사실 성폭력의 가장 좋은 예방법은 성폭력을 하지 않게 하는 걸 텐데요, 그동안 강의와 교육을 해오시며 현실적으로 느낀 어려운 점이나 한계 등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예전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근무하면서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을 하러 갔을 때는 교육장에 주로 여성 직원들이 청중으로 앉아계시고 정작 직장 내 성희롱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고용주나 임원들은 교육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성폭력·성희롱 예방교육은 늘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당사자가 취할 수 있는 조치에 관해 설명하거나, 청중을 피해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으로 상정하고 한국사회 곳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을 달리 보자는 내용의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참여예술인 오리엔테이션 교육 중 오전 강의가 끝나고 한 예술인께서 문화예술계 특성이 담긴 사례를 알고 싶고, 피해 대응이 아닌 예방교육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의견이었습니다. 성폭력 가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금까지 알면서도 실행해보지 못한 생각을 의견으로 주신 것이니까요.

사실 성폭력 가해의 배경이 되는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 대해서는 성폭력에 반대하는 여성운동가들, 시민들이 끊임없이 개선을 주장해왔지요. 법, 노동, 의료, 교육, 경제… 그 어느 분야든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이 있었으니까요. 공동체나 조직 안의 성폭력에 대해서도 여성들은 늘 생생한 이야기를 해왔어요. 가부장적 문화에 젖어있는 조직은 여성을 보호해야 할 여성과 폭력 피해를 볼만한 여성으로 구분하고 평가합니다. 성폭력 가해자는 보호를 빌미로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려고 하거나 주변으로부터 고립시켜서 성폭력 가해를 하기 쉬운 조건을 만들지요. 이 조건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은 피해를 말하면 말했다는 이유로, 침묵하면 침묵했다는 이유로 진정성을 의심받고 조직에서 소외되곤 해요. 피해자가 소외되면 조직은 가부장적 문화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고 맙니다.

여성이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공적인 역량에 따라 공정한 평가와 대우를 받는 위치에 있고 자신의 경험이 조직 안에서 공유하고 논의할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확신할 힘을 갖게 된다면 분명 가해자의 전략은 힘을 잃고, 성폭력은 줄어들 거예요. 성적 모욕감을 주는 말이나 괴롭힘, 신체 접촉의 폭력성을 인식하는 인권감수성이 공유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기본이고요.

이런 현실을 잘 반영하면서도 성폭력 가해의 심각성과 예방의 필요성을 충분히 다루는 교육을 하는 것이 지금까지 쉽지가 않았네요. 이 내용이 어떤 분들에게는 그동안 불편하다고 느꼈던 지점을 시원하게 짚어주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그동안 전혀 감당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려 불편할 수 있어요. 전에는 저도 강사로서 이런 불편감을 피하는 편이었다면, 이제는 불편하지만 한 번쯤 들어볼 만한 이야기로 준비해보고 싶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 상담팀에 계시죠? ‘여성주의 상담’이란 말이 낯선 분들도 있으실 것 같아요. 여성주의 상담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주변 환경이 가부장적 문화에 깊숙이 물들어 있을수록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해석하기가 어려워져요. 이를테면 성폭력 피해를 겪고 나서 불쾌하거나 무섭거나 화가 나거나 슬플 때, 가해자나 주변인들이 ‘너를 가깝게 생각해서’, ‘너를 예뻐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면 너무나 혼란스럽죠. 누가 가해자가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앞으로 가까운 관계를 맺겠어요? 심지어 ‘네가 예뻐서’, ‘네가 친절해서’라고 말하면 더 혼란스러워져요. 외모가 출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긍정적인 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성폭력 가해를 정당화하는 말로 이용되어 버리니까요.

또, ‘참을 수 없는 성적 충동’ 때문이라고 하면, 그동안 함께 일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면서 가해자가 자신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믿고 따르라고 해왔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죠. 가해자가 자신의 폭력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합리화하거나 주변에서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여성주의 상담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반응들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꾸 자신을 검열하게 만들어요. 여성주의 상담은 오랜 시간 지속된 차별과 폭력을 종식시키고자 투쟁해온 여성주의자들의 경험과 언어를 토대로, 나의 경험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내가 겪는 일이 왜 차별이고 왜 폭력인지, 내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스스로 해석하고 설명할 힘을 갖추게 된다면 같은 상황이 발생해도 다르게 대처할 수 있어요. 또한, 이미 해석했던 경험이 나의 관점과 사회의 흐름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장과 연대의 기회로 삼는 용기가 생깁니다.

인터뷰 성폭력 유형과 문제 제기 후 상황
세밀하게 연구해야
예술인으로서 또 여성주의 상담가로서 예술계 미투 운동을 지켜보셨을 텐데요, 피해자들이 부딪히는 공통적인 문제나 구조적 문제가 있을까요?

처음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관련 많은 미투글이 올라올 때 문화예술계 구조의 특수성을 분석해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막상 상담을 진행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는데요, 우선 ‘문화예술계’로 묶기에는 피해 양상들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다만 피해가 일어나는 세부적인 패턴이 유사할 뿐이에요. 작업을 의뢰하고 수행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미비해서 한 개인이 지나치게 권력을 갖거나 권력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기만하기가 조금 더 용이할 뿐이구요.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를 바꾸려면 예술계 성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로 광범위하게 정의하기보다는, 성폭력 유형과 문제 제기 후 상황을 나누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강의에서 잠깐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가까운 사람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우선 가까운 사람의 일이기에 더욱 화가 나거나 슬퍼지는 자기 마음을 스스로 잘 다독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의 힘든 감정만으로도 힘든 피해자가 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요. 피해자가 직접 자기 피해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들어주시면 됩니다. 스펀지가 부드러우면서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물을 흡수하듯이 경청해주실 수 있다면 좋겠지요. 만약 본인 입장이나 여러 관계 때문에 그렇게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너무 비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마음과 귀를 열고 편견을 내려놓으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분명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떠오를 거예요. 피해자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후원하는 것 역시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입니다.

끝으로, 예술인으로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바라는 점과 예술인 복지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사업모니터링을 구체적으로 한 적은 없어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진 상황과 계기 자체가 너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보니 재단 사업이 긴급 지원이 필요한 사례를 발굴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면이 있어 보여요. 장기적으로 예술가들이 지속적이고 풍부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정책이 더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평등한 작업문화와 심의 및 지원문화를 만드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만의 일이 아니니, 기존의 사회복지시스템과 창작시원시스템을 복지재단이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정부 부처와 문화재단에서 협조를 잘 해주셔서 예술인의 창작지원과 생활지원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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