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구독 신청
닫기
구독신청
메뉴바
vol.31 2019. 6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집중 기획 100세 시대를 사는 예술인

예술인 정년의 역설

2018. 8

보통 정년은 조직구성원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자동적으로 퇴직하게 규정한 한계 연령을 말한다. 인구통계학, 재정과 기대수명, 노동력 공급 등을 고려해 결정되는데, 정년제도는 직무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노령인력을 퇴출하고 조직의 능률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제도이다. 말하자면 ‘정년’은 자본주의 생산성 중심 잣대를 대변하는 단어인 셈이다. 그래서 예술인들과 정년을 짝지어 쓸 경우 다소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나이가 갖는 위계와 차별, 생산성 중심 가치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용 어구처럼 쓰이는 ‘예술(인)은 정년이 없다’란 말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정년이 구획하는 어떤 자본의 논리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예술 장르별 특수성과 예술가 개개인의 예술적 성취를 고려하지 않는 법적 정년은 부당한 현실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법적 정년 논란 미술 사례

그러나 사회의 통념은 단단했다. 2003년 9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조각가 구본주(1967~2003) 씨의 보상액 산정 기준인 정년 범위와 직종 성격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 법원이 고인의 정년을 65살로, 예술가 경력 5~6년을 인정하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보험회사 쪽이 즉각 그의 정년을 60살로 줄여야 하며 예술가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항소를 했다. 정년 문제와 더불어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지 않은 예술가의 활동 경력은 경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작동한 일이었다. 당시 대법원 판례로 소설가는 65세, 민요풍 가수는 60세로 정년을 인정한 선례가 있었으나 미술가는 적용될 만한 선례가 없었다. 사건은 모호한 예술인의 법적 지위와 정년 규정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보험회사 측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예술인의 삶과 활동 가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영화 사례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3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영화감독 박철수(1948~2013) 씨 유가족들 또한 보험회사와 법정에서 부딪혔다. 사망 전까지 개봉을 목표로 영화를 찍고 마무리 작업 중이던 그(당시 64세)에게 보험사가 법적 정년 65세를 적용하겠다고 하자 유가족들이 반발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도종환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감독이 앞으로 10~20년 이상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주장하며, 김현미, 유은혜, 송호창 등 국회의원 15명과 함께 “예술가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법정 정년 65세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정지영 감독이 67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71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83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영화작업을 진행하는 등 70~80대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화인들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 사건은 유가족과 예술계, 국회의원들이 합심해 결국 승리했다.

음악, 공연 사례

예술인이 가지는 사회경제적 위상과 정년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던 두 사건 외에도 2012년에는 서울시 산하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국악관현악단과 무용단, 합창단, 뮤지컬단 등 9개 정식 예술단의 정년제 폐지 방안을 검토한다고 알려져 논란이 있었다. 200여 명의 단원들이 채용 후 55세까지 정년을 보장받으며 2002년부터 호봉제가 채택되어 기량이나 공연 횟수에 관계없이 매년 임금이 인상되는 걸 두고 신입단원 채용이 어려운 점이나 창작 의지가 떨어지는 등 경직화를 우려하며 서울시 시의원들이 정년제와 호봉제 재검토를 제기했다. 단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정년을 앞둔 중년 예술인과 면접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신진 예술인들이 웹상에서 찬반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미술, 영화, 음악, 공연 등 장르마다 상이한 현실이 있고, 예술인들에게 적용되는 법적 정년의 잣대도 장르별로 다르다. 본래 예술(인)은 정년이 없기 때문에 법적 정년이 다양하고 상이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그래서 예술인들에게 정년은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신경 쓰이는 무엇이기도 하고, 실은 있는 것인데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하다. 설문에서 예술인들은 ‘정년은 없다’는 다수 의견과 별도로 적지 않은 수가 정년을 굳이 말하자면 ‘더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게 되는 때’로 인식한다고 밝혔다. 자발적 은퇴와 비슷하게 누군가에게는 30대의 어느 날이 될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100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요지였다. 그게 언제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고, 미리 정하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에서 예술인의 정년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선택에 영향을 주는 내외부적 요인이 존재할 것이다. 그 요인들을 제도 안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면 예술인의 정년은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을까?

집중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