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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뉴스

집중 기획 예술을 향유하는 예술인

예술인들의 예술인

2018. 10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 모든 것을 똑같이 견디진 않아요. / 방구석에 번지는 고요의 넓이. / 쪽창으로 들어온 볕의 길이. / 각자 알아서 회복하는 병가의 나날들. // 우리에게 세습된 건 재산이 아니라 / 오로지 빛과 어둠뿐이에요. / 둘의 비례가 우리의 재능이자 개성이고요.’로 시작되는 심보선 시인의 시 제목은 〈예술가들〉이다. 시인이 쓴 대로 세습된 빛과 어둠, 그리고 그 둘의 비례로 만든 각자의 세계가 너무도 달라서 예술인은 다른 예술인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스스로 팬임을 자처하는지도 모르겠다. 질투하고, 좌절하고, 파괴하는 이유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을 역사적 그룹과 예술인들을 잠깐 소개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문예활동 그룹 삼호정시사
  • 언어 이전의 별빛 죽향의 〈원추리〉
18세기 이후에야 문화 향유 계층이 비로소 신분과 무관하게 확대된다. 여성들의 문화 활동이 활발해진 것도 그즈음인데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는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평안남도 성천 출신의 기생 운초(雲楚) 김부용을 필두로 묵죽화로 유명한 평양기생 죽향(竹香), 14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금원, 가야금 솜씨가 뛰어났던 죽향의 언니 죽엽, 시 짓는 솜씨가 빼어났던 금홍, 시화에 능숙했던 경혜 모두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더불어 기녀 혹은 서녀 출신 소실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삼호정’이라는 별장에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삼호정시사’라 불렀다.

최근 19세기 여성 화가와 여성 회화 활동에 관심이 늘면서 이들의 활동과 작품을 언급하는 횟수가 늘고 있지만 당시 여성 회화 예술의 실제 자체에 대해 논의된 바가 많지 않고 작품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드물게 남은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한 뒤늦은 몇몇 연구에서는 그들이 예술인으로 함께 성장하고 문화예술을 공유하며 사회적 위상을 확대해 19세기 조선의 문화적 풍경을 얼마나 풍요롭게 바꿔놓았는지 밝히고 있다. 19세기 예술계의 지형도를 화려하게 채색하면서 신분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은 예술활동을 이어가며 서로를 의지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모델이었다.
영국 블룸즈버리 그룹 블룸즈버리 피크닉, 바네사벨, 버지니아 울프 이미지 (왼쪽부터)블룸즈버리 피크닉, 바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

1906년에서 1930년경까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에도 각자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서로의 지성과 미감을 신뢰했던 예술인들과 학자들이 모였다.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C. 벨(C. Bell), 화가 덩컨 그랜트(Duncan Grant), 바네사 벨(Vanessa Bell),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Edward Forster),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D. 가네트(David Garnett), 전기 작가 G. 스트레이치(G. Strachey), 경제학자 존 케인스(John Keynes), 정신과 의사 A. 스티븐(Adrian Stephen) 등 이들은 모두 학계와 화단, 문단의 개성 있는 모더니스트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 무렵, 혼란의 시대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특히 블룸즈버리 그룹 내 여성들의 지성과 창조성이 돋보였는데, 유명한 여덟 여성 중 화가 바네사 벨, 도라 캐링턴이 있었고, 작가 버지니아 울프, 비타 색빌웨스트, 메리 매카트니가 있었으며, 철학을 공부한 서적상 프랜시스 패트리지, 러시아 발레단 소속의 무용수였던 리디아 르포코바, 귀족 출신의 후원자 오톨라인 모렐도 함께 활동했다. 1920년대 세계공황과 파시즘의 대두로 서서히 빛을 잃긴 했지만, 이처럼 다양한 여성이 한자리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영감을 나눌 기회가 흔치 않았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이 그룹은 더욱 특별해진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예술인들
  •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 이미지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벨 에포크 시대로 가게 된 남자는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의 살롱에 들어섰다가 피카소와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마티스와 달리 등을 만난다. 그 놀라운 예술가들 중에서 남자가 꼭 만나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거트루드 스타인이었다. 현대 문학의 개척자요, 수많은 예술가들을 이끌고 경제적 후견인 역할로 등 떠밀었던 그. 파리 플로뤼 가 27번지에 위치한 그의 살롱은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나 다름없었다. 피카소와 마티스, 세잔과 마네 그리고 후안 그리스의 작품이 그곳에서 상설 전시되었다. 당시 파리 특파원으로 온 헤밍웨이 기자의 휴식처이기도 했던 그곳에서 에릭 사티는 연주를 했고, 피츠제럴드 부부는 파티를 열었다. 시인 아폴리네르, 마리 로랑생, 사진작가 만 레이, 미국 작가 손턴 와일더, 셔우드 앤더슨… 그의 살롱은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던 20세기 초 파리에서도 단연 빛나는 공간이었다.

유명해지기 전 전시장을 잡지 못하던 피카소와 마티스에게 거트루드는 기꺼이 자기 집을 전시 공간으로 내주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그림 가격이 낮은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 화가들의 가능성에 투자했다고 볼 수 있지만 거트루드가 개성 넘치는 작가이자, 작품의 가치와 예술인의 미래를 꿰뚫는 안목 높은 향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의 초상화(1906)를 보면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한쪽에 앉아 그들의 독특한 영혼을 관찰하는 거트루드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여러 화가의 영혼들이 그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의 〈재회〉 존 케이지와 뒤샹의 체스 퍼포먼스 이미지 존 케이지와 뒤샹의 체스 퍼포먼스

서로가 서로의 성실한 감상자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술인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관습적 영역 구분과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서 기존 영역을 뛰어넘는 예술을 창조해내려는 태도와 창작물로 ‘융합’의 의미를 드러냈고 실천해왔다. 1968년 3월 초 어느 날 저녁, 캐나다 토론토에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존 케이지(John Cage)가 벌인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재회(Reunion)〉는 그런 예술 장르 간 융합 외에도 예술과 일상, 예술과 테크놀로지 융합을 탐색하는 역사적인 행사로 손꼽힌다. 이 무대는 당시 실험적 작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뒤샹과 현대음악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평가된 작곡가 케이지의 협업이라는 점으로도 관심을 모았다(뒤샹 사망 후에는 그가 죽기 전 공개적으로 드러낸 마지막 모습이란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케이지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퍼포먼스에는 두 거장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협력자들의 협업이 포함되었다. 전자음악은 데이빗 버만(David Behrman), 고든 뭄마(Gordon Mumma), 데이빗 튜더(David Tudor)가 맡았다. 체스와 전기장치 연결은 로웰 크로스(Lowell Cross)가 맡았고, 또한 뉴욕에서 온 시게코 구보다(Shigeko Kubota) 등 여러 작가가 청중으로 참여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들과 함께 뒤샹과 케이지는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국적, 미술과 음악이라는 다른 배경, 25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5시간이 넘는 뒤샹과 존 케이지의 긴 공연은 융합의 대표적인 선례로서 오늘날 통용되는 융합의 개념까지 전개되는 인식과 실천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과학 기술 발달에 따른 예술 경계의 확장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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