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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9 2016. 12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칼럼 아티스트 연미

예술, 그 우아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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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제주가 좋아서 자주 오다 보니 아예 살게 되었다거나, 도시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좀 더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내려왔다는 이주민들이 점점 늘고 있다. 나도 그 흔한 ‘육지 것’으로 내려온 지 햇수로 3년이 넘어간다. 내려온 사정은 다른 이주민들과 비슷하다. 도시의 삶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리고 3년. 아직까지 제주는 내게 일상공간이나 휴양지이기보다 유배지에 가깝다.

먹고 자는 생존 때문에 쉼 없이 노동을 하지만 정작 먹고 자는 일이 한없이 미천해지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나도 먹고 자는 일이 미천했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고 라꾸라꾸 침대의 철제바가 등에 배기는 잠을 잤다. 그러면서도 작업실에 햇빛이 들어온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월세를 전전하면서도 예술작업이 무슨 보험이라도 되는 양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애써 숨겼고, 보증금을 조금씩 까먹는 어려움 속에서도 홀로 사는 부모에게 생활비를 못 보내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글을 쓰는 지금도 혹시 내가 가난을 전시하거나 엄살을 떠는 것이 아닐까 검열을 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가난은 불편 이상의 어떤 것이고, 정신과 감정을 좀먹으며 본질을 드러낸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가난이 언제나 인간을 짓누르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처럼 가난하게 살면서도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론에 통달한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있다. 노숙생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미사코 씨는 공원 텐트 안에서 살며 노숙인들과 함께하는 삶에서 가치나 행복을 찾고 있다. 나도 제주에 내려와 그 가치를 찾는 삶을 살고 있다. 한숨이 줄었고, 막힘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불안과 분노는 스스로 힘을 잃기도 했다. 무엇보다 먹고 자는 일이 호사스러워졌다. 밥을 챙겨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문밖에 벽이 아니라 땅과 햇살이 내가 느껴야 할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리던 도시의 삶과는 달랐다. 여전히 가난하고 호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랬다. 그사이 도시의 삶은 더 힘들어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퍼지면서 내가 누리는 이 정도의 안정감도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더욱이 똑같이 불안해도 좋아하는 예술을 하는 걸로 보이는 내게 사람들은 쉽게 ‘자발적 가난’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그러나 자발적 가난 등 예술가의 가난에 붙는 다양한 꼬리표는 ‘배부른 가난’이란 힐난이나, ‘우아한 가난’이니 품위를 잃지 말라는 억압의 다른 의미였다. 그런 명명의 억압과 비난 속에서 어쩌면 나는 가난하지만 우아한 예술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내 가난이 결코 배부른 가난이 아님을 스스로 자꾸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예술가의 ‘우아한 가난’이란 인식은 가난의 폭력성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경지를 매력적이면서도 색다르게 보여 줘야 한다는 이중의 요구나 다름없었다. 나는 가난한 존재가 존재 이전에 가난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 가난한 예술가는 가난을 통해 예술의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잣대에 많이 혼란스러웠다. 예술가는 있으나 사회적 개인은 없고, 사회적 개인을 획득하면 예술가는 희미해지는 식이었다. 지금도 생존활동을 하면 작업량은 줄어들고 작업량이 늘어나면 생존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을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스런 삶을 버티기 위해서는 모든 걸 멈추고 주위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바로 그 시간이 없다. 생산활동은 잠시 멈출 수 있지만 경제적 채무는 결코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혼란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 이상 작업실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고, 돈을 빌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나 좋자고 하는 예술 활동을 위해 주위에 피해를 주는 것이 염치없는 중년에 접어든 것도 한몫했다. 작업을 포기하면 적어도 내 가난 때문에 주위에 피해를 주거나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이 혼란스러운 삶의 패턴도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이르면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제주로 왔다. 시골로 들어가면 빈집도 많을 것이고, 작업을 하지 않으면 전일제로 일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미술계라는 피상계에서 멀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최소한의 시간만 일해도 일단은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외 많은 시간을 그냥 보냈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그저 하늘이고 땅이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릿속 생각이 아닌 내 신체의 변화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일, 잘 챙겨 먹고 잘 잠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의 균형들이 주는 편안함에 행복하다는 말이 입술을 움직이기도 했다. 그즈음에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보다는 일거리가 필요해서였다. 어쨌든 지금까지 해온 예술활동으로 돈을 벌게 된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 혹은 내 작업으로 타인과 사회를 만난다는 게 뭔지 몰랐다.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파견예술가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파견예술가로 동광마을에 들어갔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파고 들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고, 낯섦과 어색함을 노련하게 해결할 방법도 몰랐다. 마을 도서관에서 마을 골목으로, 마을 골목에서 마을 노인회관으로, 마을 노인회관에서 마을 복지관으로 점점 파고들 수 있었던 건 내가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혹은 예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오히려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낯선 일들을 강요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물어보고, 소개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참여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동광마을 사람들 특히 할머님들이 “옜다~ 한 번 해보자!”하고 그려준 그림들이 자수로 모여 메밀밭을 이룬 작품이 되었다. 그 작품을 마을회관, 제주시에서 전시하게 되었을 때 내 기분은 전과 많이 달랐다. 작품이 어떻게 평가받게 될지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그분들이 그려준 그림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할머니들의 그림은 짧은 시간이지만 용기가 필요한 작업의 결과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소녀처럼 웃던 일을 할머니들은 잊을지도 모르지만, 동광마을의 메밀밭을 평생 보며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메밀꽃 그림이 작품으로 남아 누군가가 볼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너무 감사했다. 커뮤니케이션 아트라는 거창한 장르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예술가나 예술이 할머니들에게는 그저 다양한 삶의 방법 중 하나로 이해되는 듯했다. 나를 그저 인간 존재로 대해주었다. 이상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으면서 내 영역을 인정해주는 태도에 나는 힘을 얻었다.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도.

삶의 혼란과 가난과 자아가 주던 혼란스러움이 잠시 멈췄다.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제주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씩 다시 세상과 만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제 알겠다. 예술이 삶을 피상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평생 노력해야 하는 일인데 내 밑천이 허약해서 아직은 제주를 유배지로 두고 있지만 제주는 바다가 지키는 유배지라 답답하지는 않다.

  • 연미 사진
  • 아티스트 연미 종이신문을 통해 사회를 관찰하고 그 시선을 재발행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 신문가판대를 제작하여 도시, 공원, 마을, 자연, 섬 등을 직접 찾아가는 로드쇼를 해오고 있다. 현재 제주에서 신체를 바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일상 환경에 접속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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