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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9

20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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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기획
2021년은
날마다 예술인 날들

공연을 지키려고 하는
연극인과 관객이 있는 한
연극은 계속될 것입니다

길해연(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여러분, 오늘 기적 같이 공연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공연이 계속될 수 있도록 마스크, 공연 중간에 절대로 내리지 마시고요, 옆 사람과도 절대 대화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협조해주셔야 공연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 기적 같은 공연이 계속될 수 있도록 여러분 도와주세요.”

객석 사이사이를 누비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하우스 매니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공연 팀에서 정해준 말인지 본인 입에서 그냥 튀어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기적’이라는 단어에 처음 객석에서는 “큭”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고 잠시의 침묵 후 관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답 대신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공연 시작 전인데도 박수 소리는 뜨거웠고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들은 발그랗게 달아올랐습니다.

공연, 기적, 그리고 뭉클함

전석 매진을 내내 자랑하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러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연이 허락된 기간이 너무 짧아 일찌감치 매진되었지만 극장 내 좌석 띄어 앉기로 객석은 휑하니 비어 보였고 극장 밖에서는 공연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분들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대 위의 배우나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더 절절하게 느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공연 중단이 계속되던 시기에 정말 ‘기적’처럼 살아남은 공연들이었기에 그때 느꼈던 뭉클함이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겪었던 공연계의 어려움과 힘겨웠던 점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곳에서 감동과 감격의 순간을 늘어놓는 저에게 누군가는 웬 뜬금없는 감상을 늘어놓느냐고 역정을 내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그 전쟁 같은 시기에 희생을 감수하며 묵묵히 연극을 지켜 오신 분들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일상에도 그렇지 않은 시기에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겐 늘 희생이 요구됩니다. 어쩌면 그동안에도 죽 그래왔던 일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극대화되어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무대를 계속하기 위한 새로운 예술 형식

어느 제작자분께서 새해 인사로 보내 주신 메시지에는 런던 웨스트엔드의 스산한 풍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극장 풍경은 쓸쓸하다 못해 괴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진들 아래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 공연계의 메카라 불리는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뉴욕의 브로드웨이 역시 3월 이후 7개월 이상 셧다운 기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공연장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비하여 그나마 한국은 좀 괜찮은 편입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작품의 숫자는 현저히 줄었지만 산발적으로라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산발적으로나마 공연을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기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게 오히려 돈 버는 일이라고 모두가 만류해도 누군가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 공연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연극계는 대처 방안으로 비대면 온라인 공연을 준비했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나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 모두 아쉽지만 온라인 공연으로 문화의 허기를 달랬습니다. 온라인 공연은 우리에게 새로운 공연 형식의 개발과 그 기술적 측면에서의 보강과 재정비가 필요함을 깨우쳐 줌과 동시에 비대면 공연이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유일무이'라는 귀한 가치를 담은 연극

하지만 그것이 공연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태의연하다고 비난을 받을지라도 온라인 공연이 현장성과 일회성의 귀중함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저는 요즘 부쩍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명이 기계화되고 세상의 삶의 방식이 다 비대면으로 바뀔지라도 누군가는 극장을 찾을 것이고 그래서 또 누군가는 무대 위에 올라가 관객을 맞을 것이라고….

공연은 어떠한 공간에서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 귀한 가치를 가진 일이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코로나 같은 사태가 또 터지면?’, ‘이보다 더한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라는 물음에 모범 답안은 있을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연을 지키려고 하는 연극인들과 관객들이 있는 한 연극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부탁드립니다. 단지 그 책임을 온전히 그들의 몫으로만 남겨 놓지는 말아달라고…. 국가와 예술인들, 그리고 단체들이 함께 공연을 온전하게 공연인 채로 살려 둘 수 있는 방법을 머리 맞대고 고민해보자고….

다시 한 번 힘겨운 시기에 연극을 지켜 주신 모든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극장에서 관객과 하나 되어 신나게 놀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라 믿으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합니다. 살아남아 극장에서 반가운 얼굴로 뵙는 그날까지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길해연 1986년 극단 ‘작은신화’의 창단 단원으로 현재는 극단의 부대표이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