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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1

20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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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코로나19 임팩트

지난 인류 역사 속 팬데믹 시대
예술은 어떻게 위기에 대처해 왔을까?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우리는 '자가격리에 최적화된 민족'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무슨 말인지 묻자 단군신화가 증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러니까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으로 백일을 버틴 민족이니 2주 정도의 자가격리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이다. 별로 웃을 일이 없는 요즘 단군신화까지 꺼내면서 우리 민족이 자가격리에 강한 내성이 있다고 말하는 넉살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니 우울했던 마음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 같다.

팬데믹의 역사에서 배우는 문화예술계의 미래

어느덧 국내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 석 달째가 되고 있다. 3월 22일부터 시작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도 2주 단위로 계속 갱신되는 가운데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바뀌고 있다. 다행히 국내의 상황은 다소 나아지는 것 같지만 다른 나라에서 들려오는 공포스런 뉴스는 여전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해 보인다.

여기서 발표되는 경제지표마다 마이너스가 이어지는데 만약 문화예술계에 대한 지표가 있다면 그 수치는 실물 경제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공연계와 영화계, 그리고 미술계 모두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코로나19 이후에 우리 문화예술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과연 우리는 과거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쩌면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지금 코로나19처럼 전 지구적인 대역병은 과거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을 초토화한 흑사병이나 20세기 초에 불어닥친 스페인 독감은 전염력이나 치사율에서 코로나19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따라서 이 두 역사적 사례는 다소나마 우리에게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향방을 가늠하는데 기준이 될 것이다.

미술의 사회적 존재방식의 변화를 이끈 사회적 거리두기

1347년부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염병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가 이 흑사병으로 사망한다. 병에 걸리면 시신이 검게 타들어가면서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갖게 되는데, 전염력도 엄청나서 당시 기록에는 눈만 마주쳐도 옮는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 병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도망밖에 없었다. 일단 이 병이 도시나 마을에 들어오면 시골이나 인적이 없는 곳으로 피난만이 살 길이었다. 결국 지금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자가격리나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공할 전염병 앞에서는 역사적으로 필수적이고 유효한 조치였던 것이다. 사실 격리를 뜻하는 영어 ‘콰란틴(quarantine)’이란 용어도 이때 이탈리아에서 유래하게 된다. 흑사병 이후 이탈리아 베네치아 정부는 외부로 들어오는 배에 대해 40일간 격리조치를 취했는데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quaranta)’가 격리를 뜻하는 용어로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중세문학을 대표하는 『데카메론』도 자가격리 중에 나온다. 흑사병이 피렌체를 강타하자 이를 피해 남녀 10명이 시골로 피난 가서 10일 동안 하루에 각자 한 가지씩 이야기를 풀어놓은 100개의 이야기를 묶은 책이 바로 『데카메론』이다. 자가격리 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어서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흑사병의 영향력은 미술에서도 엄청났는데 무엇보다도 미술의 사회적 존재 방식 자체를 바꿔놨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죽음 앞에서 당시 유럽인들은 『데카메론』처럼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려 했고, 나아가 자신의 행적을 그림으로 남기려 했다. 이 때문에 미술은 일종에 호황기를 맛보게 된다.

팬데믹이 써내려간 예술의 역설

안드레아 오르카냐, 〈스트로치 제대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1357

흑사병 직후에 제작된 이 제대화는 대역병의 공포 때문인지 엄격하고 단조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문예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실 흑사병을 이야기할 때 역설적으로 ‘르네상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유럽인을 엄격한 종교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성과 이성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했기 때문이다. 가공할 전염력을 가진 흑사병은 가까운 친지들과 동료들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했다. 검게 타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흑사병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집행할 신부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흑사병이 가져온 엄청난 죽음을 냉정하게 목격한 유럽인이 다시 역사를 써내려간 결과가 바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흑사병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반전을 이뤄냈지만, 스페인 독감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결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봄부터 1920년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걸렸고 최대 5,000만 명이 이 독감으로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당시 일제의 무책임한 대처로 14만 명 가까이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에드바르트 뭉크,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신의 모습〉,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1919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이겨내고 이후에도 꾸준히 작업에 몰입한다.

스페인 독감은 이렇게 20세기 전반에 가공할 상처를 인류에게 남겼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 영향력은 독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시기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묶이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이어진다. 현대 문화예술 운동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어느 누구도 가볍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지만, 현실을 떠나 꿈과 판타지 세계를 추구했던 이 문예운동 후에 펼쳐지는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의 교훈을 냉철히 읽어내지 못한 덕분일까, 곧이어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직전의 재앙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적 대재앙으로 기록된다.

역사적으로 흑사병은 르네상스로 이어진 반면, 스페인 독감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이 두 갈림길을 우리 미래에 투영시킨다면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장밋빛 세계의 가능성도 있고,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세계전쟁의 길로도 이어져 있다고 본다. 이 극단적인 좌표 속에 어떤 길로 들어서게 될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또다시 역사적 기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