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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1 2019. 6 로고

예술인복지뉴스

대화 표준계약서와 영화계

만드는 사람이 더 행복한 영화판을 꿈꿉니다

김원훈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제작실장 2019. 6

2014년부터 도입된 영화계 내 ‘표준계약서’가 새삼스레 주목받고 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표준계약서를 준수했다는 사실이 미담처럼 퍼졌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 근로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당연한 일이 화제가 될 만큼 영화 제작 환경은 높은 근로 강도와 열악한 처우로 악명 높았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표준계약서로 계약한 경험이 있는 영화 스태프는 열 명 중 일곱 명. 표준계약서는 영화인들에게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표준계약서 도입 후 영화 제작 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롱 리브 더 킹〉, 〈범죄도시〉 스태프들과 표준계약서를 체결하고 재단의 예술인 사회보험료 지원을 받은 제작사 비에이엔터테인먼트의 김원훈 제작실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편집실 사진 최지원

김원훈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제작실장 2014년 표준계약서 도입 전후로 제작 현장 분위기가 크게 다를 것 같습니다. 영화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어땠나요?

2004년에 〈말아톤〉, 〈슈퍼스타 감사용〉 등 보조 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계에 입문했어요. 그때부터 제작에 꿈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인 소개로 〈미나문방구〉 제작팀 막내로 들어간 게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십여 년 전 제가 보조출연 일을 할 때는, 스태프 대부분이 두세 달 일하고 50만 원에서 80만 원 정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최저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열악한 임금체계였죠. 정말 ‘열정페이’였어요. 36시간 연속 근무를 하거나 매일 밤을 새우는 게 흔한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이 아니었어요(웃음). 그러다 보니 많은 사고가 생겼죠. 졸음운전이나 과로 등으로 생긴 사고가 일 년에도 몇 건씩 있었으니까요.

*김원훈 제작실장이 보조출연 일을 하던 2004년 9월~2005년 8월 최저시급은 2,840원, 8시간 근무 기준 일급은 2만 2,720원이었다. 근로 시간을 2019년 현재 기준인 주 52시간으로 계산하면 한 달 최저임금은 58만 7,290원이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변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아니라, 불과 3~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어요.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어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웃음). 당시엔 ‘돈도 못 버는데 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판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막상 결과물을 보면 그 쾌감이 정말 커요. 저희끼리는 이 일을 ‘마약’이라고 해요. 끊을 수가 없다고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다가도 새로운 일이 생기면 힘든 건 잊고 또 신나서 가고.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는 분위기였어요.

떠나기보단 근무환경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영화는 사람에게 여러 감정을 일으키는 콘텐츠잖아요. 관객을 울리고 웃기고, 화가 나게도 만들고. 그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감정 없이 일하고 있다는 게 줄곧 마음에 걸렸어요. 만드는 사람들부터 좀 행복해야죠. 저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많은 사람이 근무환경을 바꿔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즈음에 표준계약서 얘기가 맞물려 나온 것 같아요.

이전에는 과로사도 많이 있고 열정페이 문제도 컸는데, 이제는 정말 180도 달라졌어요. 인식 자체가 바뀐 거죠. 지금은 ‘열정페이는 무슨 열정페이냐. 쉬는 시간도 보장해달라’는 분위기니까요.

표준계약서가 도입 이후 빠르게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표준계약서 체결이 정부의 권고사항이어서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어요. 또한 영화계 내부적으로도 근로환경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해보자는 분위기가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빠르게 시작해서 정착시킨 게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영화 스태프들은 수용이 빨랐어요. 표준계약서에는 일할 시간과 시급이 정해져 있고, 약속한 시간을 초과하면 추가 수당을 지급한다는 항목들이 포괄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근무환경이 좋아지는 것이에요. 대신에 ‘이게 정말 될까?’하는 의심들은 있었죠. 지금까지 몸에 익은 노동 강도로 봤을 때 계약서의 내용들은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으니까(웃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표준계약서가 도입되면서 좋아진 건 노동 강도가 완화됐다는 거죠. 계약서를 기준으로 근무환경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 같으면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거듭 촬영했는데, 지금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고민하거든요. 촬영 중에도 종종 근무 시간을 체크해요. ‘우리 시간 얼마나 남았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았으니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을 모으기도 하고요. 현장이 더 재밌어졌어요. 조금씩 체계가 잡혀가고 있는 것 같아요.

회사 입장에서는 영화 제작비가 올랐죠. 물가 상승의 영향도 있지만 2014~2015년 상업영화 1편 기준 순제작비 평균이 30억~35억 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약 50억 원이거든요. 5년 사이에 0.5배가 늘어났어요. 사실은 이게 정상적인 거고, 이제야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거죠. 이제 표준계약서는 당연한 일이고, 요즘 화두는 *주 52시간 근로에요.

*그동안 영화계(영화 및 영상업)는 근로시간 특례업종에 속해 사실상 ‘무제한적인 장시간 노동’이 가능했다. 2018년 7월 1일부터 영화 및 영상업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며 일반업종과 동일하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게 됐다. 현재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에서 시행되고 있는 ‘주당 근로시간 52시간’은 2020년 1월부터 50인 이상 사업장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주 52시간 근로의 어떤 점이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인가요.

다른 업종을 보면 근로 시간이 줄어서 임금이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그런데 노동시간 감축으로 스태프들의 임금이 전보다 줄어든다면 주 52시간 근로 의미가 퇴색되어버리잖아요. 지금은 52시간이지만,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앞으로 근로 시간은 더 단축될 수 있는데, 그게 급여가 작아진다는 말이 되면 안 되니까 그 부분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이 있죠.

김원훈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제작실장 영화계에 더 필요한 제도나 지원해줬으면 하면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52시간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아요. 영화계는 매년 새롭게 과도기를 겪고 있어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상황이 급변하고 있거든요. 표준계약서, 최저임금 이슈 등이 있었고 이제는 이 근로 시스템을 어떻게 체계화시키고 영화 환경과 호환할 것인가 고민이 많아요. 기준이 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그걸 바탕으로 필요한 제도들이 가지 치듯이 뻗어 나갈 것 같은데 아직은 다음을 말하기엔 조금 섣부른 시기인 것 같아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표준계약서를 체결한 예술인과 예술단체에 사회보험료 50%를 지원하고 있는데, 제작사나 영화인들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궁금합니다.

회사뿐만 아니라 스태프들한테도 지원이 되기 때문에 다들 좋아하죠. 대신 ‘이걸 왜 주는 걸까?’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표준계약서 사용 및 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원되는 돈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불쌍해서 주나보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웃음).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스태프 개인이 신청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제작사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인지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주변 예술인들이 재단의 존재나 역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저는 지인을 통해 예술인패스를 알게 돼서 발급받았고, 온라인 뉴스레터도 보고 있지만, 주변에는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영화 스태프들도 사회보험료를 지원받고 있지만, 제작사에서 신청해서 처리하기 때문에 재단에서 준다는 사실을 잘 몰라요. 어렴풋이 예술인을 돕는 단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한 이름이나 어떤 지원 정책이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김원훈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제작실장 혹시 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예술인들은 정말 먼 미래를 보고 일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영화 제작에 꿈을 가진 분들은 모두 ‘내가 지금 당장 돈이 없고 힘들어도 언젠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천만 영화를 만들어내겠지’ 생각하면서 나아가겠죠. 오히려 영화현장의 스태프들은 영화를 할 기회가 더 열려있고 조금씩 환경이 개선되고 있지만. 사실 배우분들이 오히려 저희보단 기회의 문이 좁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범죄도시〉로 함께 일했던 진선규 배우가 인터뷰 중에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데요. 15~16년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또 연극판에서 유명한 분임에도 그동안 내 가족들이 먹고 싶은 걸 원 없이 사줄 수 없던 게 마음이 아프셨대요. 그런데 얼마 전 ‘가족들이 먹고 싶다는 걸 마음껏 사줄 수 있는 게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제작사만 해도 영화 한 편 들어갈 때마다 프로필이 천여 통씩 와요. 정작 오디션으로 뽑히는 사람은 20명 남짓인데요. 배우들이 기회 잡기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계속 연기를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겸하는 분들도 많고요. 〈범죄도시〉 계약 당시 김성규 배우(범죄도시 양태 역)가 계약서 쓰기로 한 날 밤늦게 오셨거든요. 제가 왜 이렇게 늦으셨냐고 여쭤보니까 배달 아르바이트도 하고 계시더라고요.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달려나가시는 배우분들도 재단에서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스태프들과 저는 일단 주 52시간 근로부터 해결하고요(웃음).

앞으로 제작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신가요?

처음 영화 시작할 때부터 음악영화가 하고 싶었어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과 〈라라랜드〉를 좋아해요. 그런데 한국에서 뮤지컬 영화…. 냉정하게 보면 망할 것 같지만 또 모르죠(웃음). 〈부산행〉처럼 누군가 스타트를 끊으면 뮤지컬 영화가 쏟아질 지도요. 영화로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정말 무궁무진하거든요. 영화인들은 그 무궁무진함에 기대 꿈을 꾸면서 가는 것 같아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예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건강하세요(웃음). 정말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넓은 의미로요.

김원훈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제작실장